MOVE에서 이어지는 글
론고와는 그리 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 함께 지낸 시간을 따져도 귄트보다 훨씬 타인일 정도다.
이브가 론고를 처음 만난 건 칸델라에서 비렛의 경호-또는 감시-를 할 시절, 론고는 그 옆에서 치와와처럼 알짱거리던 때였다. 어디에나 있는 잡놈이라고 생각했다. 간식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꼬리를 흔드는 기회주의자. 리더가 될 능력도 배짱도 없어 평생 남의 비위나 맞추고, 그게 현명하다 믿는 부류. 친하게 지내봤자 나중에 도박 빚이나 대신 갚아줄 게 뻔해 비렛에게도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경고를 주기도 했다. 그때 비렛이 뭐라고 했더라.
‘그렇게 생각해?’
라고 했었나. 기억이 흐리다. 결국 크게 신경 쓰지 말기로 했던 것 같다. 그의 역할은 공식적으로 경호였고, 친구 단속은 거리가 먼 업무였다.
이번에도 그러면 될 일이었다. 최소한의 조언만 건네며 신경 써주는 척, 그렇게 무시하면 끝날 일이었다. 칸델라를 빠져나온 지금 그는 더 이상 비렛의 경호도 아니었고 그냥 알고 지내는 친구, 좀 더 공식적으로는 아랫집 이웃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론고에 대한 인식이 조금 바뀐 것도 있었다. 어느 정도 알고 지내보니 영 불성실한 놈은 아닐 거란 신뢰가 생겼다. 첫째로 빚이 없었고, 둘째로 론고는 비렛을 곧잘 따랐으니까. 30만 달러를 들고 도망치면서도 비렛의 고갯짓 한 번에 망설임 없이 합류했으니까. 셋이 만난다 해도 술 좀 먹자고 하는가보다. 그러면 될 일이었다.
그럼 대체 왜, 그는 비렛 대신 사웅의 미니밴에 올라 어두운 밤길을 달리고 있는가.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영 괜찮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를 물었다.
“제이가 누군데?”
비렛은 그 이름을 얘기한 적이 없다. 친구도 아니었고 고객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브가 아는 한은 그랬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이브와 알기 이전의 인연이거나, 론고와 비렛 두 사람의 공통분모인 클럽 관계자. 후자라면 당연히 사웅과도 인연이 있을 것이다.
“모릅니다.”
말 그대로 한 치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창밖을 똑바로 보며 사웅은 말했다. 마치 머리 위에서 누군가 당기고 있는 듯이 사웅은 꼿꼿이 목을 세워 앞을 바라보았다.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는 묵직한 자동차도 사정없이 흔들어댔지만 사웅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고 다발 구역이라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운전대를 잡은 사웅의 양손 마디가 덩달아 하얗게 바래진다.
“정말 몰라?”
“처음 듣습니다.”
“론고는 뭐라고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비렛이 나올 거라며. 뭐 아는 거 아냐, 그럼.”
“그렇게만 들었습니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 이브는 묻기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번엔 성의 없는 대답만 하던 사웅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온다. “저기, 누님.” 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덜컹거림 안에서도 낮게 깔린다.
“누님께선 타니아 누님과 함께하고 계시죠?”
그리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진다. 타니아, 그 이름을 지금 들을 줄은 몰랐다.
타니아 베라 데 라 로사.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정신이 아득했지만 지금은 전부 외우고 있었다. 타니아, 이건 엄마가 지어준 내 이름이야. 베라, 이건 이혼한 아빠의 성이고, 데 라 로사, 이건 우리 엄마 성이야.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입술을 따라 이브도 천천히 발음했다. 그의 악센트를 흉내 내며 한 글자씩,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어 물어보았다. 아빠 이름은 빼도 되지 않아? 그랬더니 그 사랑스러운 아이는 도톰한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럼 아빠가 서운해하잖아.”라고 말했다. 엄마랑 아빠는 이유가 있어서 헤어졌을진 몰라도 자기한텐 다정한 아빠라면서. 타니아는 쉽게 사람을 제 안에 들였고 쉽게 내보내지 않았다.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았다. 사웅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비렛의 친구니까 론고도 친구였고, 론고의 친구니까 사웅도 전부 제 친구다. 그럼, 사웅이 타니아의 이름을 꺼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브는 서둘러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데 걔가 너한테 누나가 맞아?
맞습니다. 제가 군대를 못 가서 아직…….
……그래. 어쨌든.
“함께 하고 있지. 같이 산 지 좀 됐다.”
“두 분은…….”
“여자 친구. 타니아는 내 여자 친구, 나는 타니아…….”
여자 친구. 그 말을 꺼내려는데 선뜻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뭐, 그런, 친구. 결국 그렇게 마무리해 버린다. 이제껏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요 근래 도무지 그 Amigo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쉽게 사람을 들이고 쉽게 보내지 않는다. 나 역시 타니아에게 그 정도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면, 기꺼이 타니아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내고 깨끗하게 사라지겠노라고. 그게 타니아에게 좋은 일일 거라고.
그때까지만 함께 있게 허락해 달라고. 화면을 켜지 않은 스마트폰을 괜히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이브는 입을 다물었다. 검은 액정에 비치는 건 헤드라이트로 희미하게 밝혀진 제 얼굴뿐이다. 그제야 생각이 난다. 타니아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사온다고 하고 나온 건데, 젠장,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이라도 연락해야 하나 괜히 손가락만 움직이는데 멈춘 줄 알았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럼, 하는 사웅의 목소리가 엔진만큼이나 낮게 떨린다.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이루어주고 싶으시겠네요?”
사웅이 비렛을, 정확히는 론고를 따르게 된 이유를 이브는 야마다에게 전해 들었다. 그날 상황이 얼마나 웃겼다고 하는지, 짧은 이야기를 길게 해주면서 야마다는 한참을 웃었다. 젊은 게 좋다느니, 열정이 대단하다느니, 자긴 언제 그런 사랑을 해봤나 싶다느니. 그래서 이브도 같이 웃으며 한마디 했었다. 그 자식 지렸겠는데요. 그러자 야마다가 이런 말을 했다.
괜찮아. 덮어줄 놈이 생겼잖아.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빛은 얼마 없었고 사웅의 표정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참 기구한 운명이다. 어쩌다 이런 처지로 태어나서 눈치 보이는 사랑을 하고, 쉬이 털어놓지 못할 고민을 끌어안고 밤을 지새운다.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앨라이는 앨라이고 게이는 각자의 연애에 신경 쓰느라 바쁘다. 지금처럼. 이브는 팔꿈치로 운전석을 툭툭 쳤다. 야, 말해 봐. 선배 게이가 선심 쓴다, 일부러 분위기를 돌리려고 목소리를 좀 가볍게 한다. 그래봤자 심란한 마음은 여전하겠지만.
“왜, 무슨 일 있어?”
바로 대답을 들을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커피라도 마시면서 느긋하게 얘기할 수 있겠다면 좋겠지만 이 분위기도 나쁘진 않다. 가볍게 덜컹거리는 자동차의 진동을 느끼며 이브는 대답을 기다렸다. 사웅이 입술을 축였다. 운전대를 잡은 양팔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듯하다가 이내 누님, 하고 그가 이브를 부른다.
“다비드를 좀 도와주십시오.”
부술 듯한 진동이 차 안을 뒤흔들었다. 사웅의 전화에서 울린 진동이었다. 내비게이션 대용으로 쓰던 전화의 화면엔 지금 지나는 지역의 이름과 발신인인 다비드의 이름이 크게 표시된다. 뭐라더라, 드웬이 이럴 때 하던 말이 있다. 양반은 못 된다고 하던데. 왜 그런 말을 쓰는지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진 못했다. 대신 가볍게 웃어주며 턱짓으로 전화를 가리켰다. 받아, 라는 허락 아닌 허락이 이브의 입에서 떨어진다. 중요한 자리도 아니었고, 실례가 되는 행동이 될 사이도 아닌데 사웅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쓸데없는 인사 대신 “예, 가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전화를 시작한다. 그 모습이 연인보다는 부하 직원처럼 보인다. 이브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사웅의 고민에 대해 상상했다.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사웅의 고민을 상상하는 것 보다는 조용히 있는 편이.
사웅은 소리를 키우기보다 핸드폰을 들어 귀에 가져다 대기를 선택했다. 전화가 걸려 올 줄은 몰랐는지 이어폰은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전화 밖으로 다비드의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잘 오고 있느냐느니, 어디쯤 왔냐느니 하는 평범한 질문을 한다. 그에 사웅도 그렇다, 거의 다 왔다, 같은 대답을 보낸다. 이브는 그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금방 오겠네.” 그 말을 끝으로 기지개를 켜는 듯한 작은 신음이 들려온다.
「그 쥐새끼랑 잘 오고 있지?」
그러다 불쑥, 전화 밖으로도 선명하게 터져나갈 정도로 큰 다비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웅의 어깨가 아주 작게 떨렸다.
“…예, 가고 있습니다.”
「불평은 안 해? 순순히 왔을 리가 없는데.」
사웅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브를 포함한 다른 모두가 한국어로 그와 대화를 했다. 다비드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두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자주 보진 못했지만— 두 사람은 다비드의 열심히 익힌 한국어와 사웅의 신중함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지금은 군데군데 영어가 섞여 있다. 얼핏 들리는 바로 술을 좀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제이’라는 사람과 같이 있는 건가? 그러나 따로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너무 작은 소음이라 이브가 듣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만,
다비드가 부르는 쥐새끼(RAT)가 누구를 향한 호칭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비버(Beaber)가 운영하는 카페 버니(Bunny)에서 일하는 쥐새끼(Rat)라 B-ret. 이브를 고용하며 비렛을 소개할 때 칸델라가 그렇게 말했다. 사연은 모르겠지만 연유는 그랬다. 사웅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이브는 운전석 쪽으로 몸을 조금씩 기울였다.
사웅의 시선이 아주 잠깐 이브, 조수석 쪽으로 향한다.
“와 주셨습니다.”
「희한하네. 바꿔줘 봐. 얘기 좀 하게.」
“그게, 주무십니다.”
「뭐야? 멀미해?」
“술을 좀 드셨다고 해서.”
전화 너머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껄껄거리기도 했고 끽끽거리기도 했다. 평소의 론고의 웃음소리가 아니다. 그러다 뚝, 소리가 끊기고 잠시 듣고 있던 사웅이 차를 세웠다. 여전히 길은 빛이 거의 없는 어둠 속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사웅은 아무 말도 없다. 자는 사람을 향해 말을 걸 수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대신 눈빛으로 무언가를 전한다. 어쩐지 그 의도를 알 것만 같아 이브는 턱짓으로 편하게 전화를 받고 오라는 대답을 보냈다. 차가 크게 흔들렸고 문 닫는 소리가 묵직하게 뒤를 이었다. 그때야 이브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하루가 지나 있었다. 그래봤자 일이분 정도지만 날짜가 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심야 0시는 묘한 기분을 가져다 준다. 핸드폰을 괜히 문지르며 지금이라도 타니아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결정을 내리기보다 먼저 작게 진동이 울린다. 타니아가 보낸 메시지였다.
[왜 아직도 안 와 어디야?]
보채면서 동시에 걱정도 해 준다. 타니아는 그런 성격이다. 원하는 건 전부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지금 그가 가장 원하는 건 이브의 답장일 것이다. 말도 않고 장시간 곁을 비운 죄는 크다. 서둘러 타니아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을 보내려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나 떠오르는 건 아무리 좋게 봐 줘도 무책임해보이는 말들 뿐이다. 별일 아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 전화도 아니고 이런 메시지만 달랑 보냈다가는 돌아가서 가장 먼저 싸움부터 하게 된다. 그래, 전화를 하자. 보내려던 메시지를 지우고 연락처에서 타니아의 이름을 찾았다. 목소리를 들려주고, 뭐라고 말을 하면 되나.
전화를 해도 되나.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을 직전에 멈췄다. 이해를 할 순 없어도 느낄 수는 있었다.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던 론고의 괴상한 웃음 때문일지도 모르고 제이라는 낯선 이름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브는 타니아의 이름 위에서 한참을 헤매다 결국, 드웬의 이름을 찾았다.
무슨 일이냐며 전화를 받는 목소리에 졸린 기운은 없다. 덕분에 편하게 물어볼 수 있겠다. 사웅이 돌아오기 전에 용건을 끝내야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이가 비렛을 찾아.”
그래서 다른 수다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왜?」
“모르지. 누군데? 론고랑 비렛이랑 아는 사람이야?”
「뭐? 론고는 왜, 아냐, 잠깐, 처음부터 얘기해 줘.」
“말했잖아, 제이가 비렛을 찾는다고.”
생각보다 드웬은 더 크게 당황했고 이브의 질문은 심문에 가까워졌다. 제이가, 대체, 누구야. 그 암호 같은 이름의 실체를 어서 밝히라는 재촉이 대답 없는 전화를 두드렸다. 드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재촉이 있고 나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제이콥 프라우드 주니어. 우린 그를 제이라고 불렀어.」
“프라우드? 칸델라를 가끔 찾아오던 그 할아버지 말이야?”
「그래. 그 사람한테 아들이 하나 있었잖아.」
이번엔 이브가 침묵을 지켰다. 칸델라라는 조직 안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갔다면 프라우드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한때 칸델라의 명운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조직이다. 어느 사건을 기점으로 칸델라가 다른 그룹과 손을 잡아 그 역할은 전에 비할 수 없이 작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사회에 이름을 떨치기엔 그 ‘사건’은 그리 큰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한 CEO의 아들이 살해당했다. 머리가 완전히 날아갈 정도의 총격이라고 했다. 범인은 그와 약혼 관계에 있던 한나 칸델라였고, 사건은 정당방위로 종결되었다. 뉴스 보도까지 될 정도로 꽤 큰 사건이었다고 기억한다. 이브도 인터넷 뉴스로 기사를 보았다. ‘피로 얼룩진 치정극 : 약혼자의 외도를 견디지 못한 남자의 최후.’ 어찌나 자극적인 제목이던지. 상관의 섹시한 아내와 끝내주는 시간을 보내다 정말 영영 군복을 벗게 된 그는 기사를 보며 자기도 그냥 상관의 대가리를 날릴 걸 그랬다고 후회도 했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무죄로 풀려난 칸델라와는 달리 이브는 징역을 살았을 테지만.
얼마 안 있어 그 사건의 주인공을 경호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칸델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면접을 보면서도 가물가물했던 기억은 그의 입사(대충 그렇다고 하자)를 비아냥대던 누군가에 의해 확실히 떠오르게 되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는 아마 이렇게 말했다.
‘그 비렛 리의 경호원으로 들어왔다고? 와, 고생깨나 하시겠네. 얼마 전에 그놈 죽이려던 프라우드 주니어 얘기 당신도 알지, 까딱 잘못하면 당신 목숨도 지옥행일 수 있다 이거야. 아무쪼록 조심하쇼. 명줄이든, 여자라면 눈빛부터 변하는 그놈 애교에든.’
그 말을 누가 했더라. 그게 다비드였나, 정말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얘기를 들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야? 귀신이 사람을 불렀다고?”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그거야. 무슨 일이야?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사웅이가. 론고가 그랬대. 제이가 비렛을 찾으니까 데리고 오라고.”
「뭐?」 다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마치 누가 듣고 있기라도 한 듯 드웬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 둘이 같이 있어?」
“누가, 비렛이랑 론고? 아니, 비렛은 자기 집에 있어. 내가 대신 왔어.”
「뭐? 야! 뭔 줄 알고 가!」
“론고야, 드웬. 우리랑 같이 바다 건너 타지까지 온 그 애라고. 제이는, 난 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사웅이도 론고도 다 우리 친구잖아.”
「그럼 비렛은 왜 같이 안 갔어?」
“모르지. 그래서 내가 너한테 연락을 한 거야.”
드웬이라면 론고가 들어가는 자리를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드웬의 한숨이 거절의 의미인지 동의의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동의해 줄 거라고 기대를 건다. 우리는 한나에게서 벗어났어. 드웬, 이제 네가 우리의 보스야. 언젠가 심장이 멎은 비렛을 태우고 달리던 때 그런 말을 했었다. 그의 결정은 훌륭했고, 그래서 이브는 이런 순간의 드웬을 믿었다.
「…지금 어디야?」
그리고 그는 신뢰를 배신하지 않는다. 이브는 차에 있는 내비게이션을 보았다. 사웅이 핸드폰으로 쓰던 것만큼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지금 멈춘 장소는 알 수 있었다. 여기가……. 모르는 지역이다. 이브가 어설프게 따라 읽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카메라를 켜 화면을 찍자 카메라 플래시가 환하게 터졌다. 찰칵, 하고 일순 빛이 쏟아진다.
눈이 부셨다. 어둠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가. 사진을 보내려면 화면을 보아야 했기에 이브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빛은 여전히 환했고 심지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뭐야, 작은 중얼거림에 이번엔 드웬이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어딘데?」그게, 여기가 어디냐면. 이브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차가 오고 있다.
“아, 기다려봐. 차 온다.”
「차?」
“산길이거든. 길이 좁아서 지나가려면 비켜줘야 할 것 같은데. 운전을 사웅이 했는데 지금 전화받으러 나가서.”
산길을, 이 시간에? 전화로 흘러나오는 드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말에 이브도 일순 차 문을 열려던 손을 멈췄다.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향하는 자가 있다면 벗어나는 자도 있을 테니, 그들의 목적지를 거꾸로 돌아오는 이가 존재하는 건 당연했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도 사람 사정은 다양한 법이니까.
그러나 흔한 일은 아니다. 이브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다가오던 차가 멈추고 운전석에서 사람이 내렸다. 곱슬거리는 검은 단발과 헤드라이트에 비쳐 더 창백해진 피부, 다비드 론고가 운전석의 문을 던지듯 닫았다. 차는 계속 움직였다. 사웅의 차보다 조금 큰, 낡은 소형 트럭이 운전자를 잃고 산길을 미끄러졌다. 타니아가 떠올랐다. 아이스크림은 사 놓고 올걸. 그런 바보 같은 후회가 뒤를 잇는다.
같은 상황이라면 타니아는 누구를 떠올릴까, 하는, 미련 맞은 생각이 마무리를 흐트러뜨린 건 아주 짜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트럭에 밀려 저 멀리로 사라지다시피 한 밴을, 사웅은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큰 차는 아니었다. 열 명도 들어가지 못하는 작은 밴은 낡았고, 소형 트럭에도 충분히 밀릴 정도로 듬직하지 못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형님이 버리다시피 하며 그에게 넘겨주었으니 사웅이 탄 것보다도 훨씬 먼 거리를 차는 달렸을 것이다. 그 밴이 이젠 비탈길 아래로 굴러 내려간다. 가드레일을 부수고 큰 소리를 내며 박살 난 조각을 흩뿌린다. 살 수 없다. 본능적으로 그는 느꼈다. 이런 순간이 몇 번인가 있었다.
사람은 쉽게 죽는다. 큰 사고가 나서도 죽고 다투다가 머리를 잘못 맞아서 죽기도 한다. 사웅은 많은 죽음을 지나왔다. 사람의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광경도 보았고 소리 없이 마지막 숨을 내쉬는 장면도 보았다. 이런 ‘우연한’ 사고는 그에게 충격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흔했다. 그러나 사웅은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귀에 댄 핸드폰을 내릴 수도 없었다. 다비드의 목소리가 한쪽 귀에서, 그리고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스트-라이크!” 그렇게 외친 뒤 후, 하고 시원하게 뱉어내는 숨이 휘파람 같다.
“개판 났네? 아-, 시체는 찾아야 너 차도 새로 뽑아주는데. 어쩌냐?”
어쩌냐고? 당장 구해야 했다. 다른 모든 걸 전부 뒤로 하고 차가 떨어진 아래로 내려가서 이브를 찾아야 했다.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전에 군인이랬다. 잘만 버텨주면, 지금 구한다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지금 당장 움직인다면.
그러나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다비드가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바짝 다가온 탓일까, 트럭의 운전대를 잡았을 열띤 손으로 제 뺨을 찰싹 두드려 주고 있는 탓일까, 흰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는 탓일까. 모든 근육이 밤바람보다도 차게 식어버린 중에 심장만이 빠르게 뛰어댔다. 아래턱까지 툭, 툭, 진동이 튀어서 입을 열면 다비드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사웅아? 여보세요, 듣고 있어? 정신 있어?”
그러나 다비드는 다르다. 유쾌하게 웃으며 너무도 쉽게 사웅을 부른다. 소리를 내어 대답하는 대신 눈만 겨우 돌려 마주치자, 반듯한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비드가 다가온다. 그래, 사웅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서늘하면서 동시에 다정하다.
“시체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그 쥐새끼 대가리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응?”
“…다비드, 제가…….”
“그 머리가 있어야 내가 돌아갈 수 있어. 씨발, 다 좆 된 계획이 지금 되려고 했다고. 사웅아, 네 거짓말만 아니었다면.”
제가, 말씀 못 드린 게 있습니다. 그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다비드의 얇고 긴 손이 사웅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목이 졸릴 정도로 세게 틀어 잡힌 멱살에 숨까지 턱 막힌다. 다비드는 그보다 한 뼘이 조금 안 되게 작다. 그런데도 때때로 저보다 큰 사웅을 정신없이 흔들어댈 정도의 힘을 보여준다. 처음 그를 피해 비렛의 집으로 숨어 들어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그런 모습으로 다비드가 소리를 질렀다. “네 거짓말만 아니었다면!” 그래도 조금 전까진 서툰 한국어를 조금씩 섞어 주었는데, 이젠 거의 모든 부분이 빠른 영어로 흘러나온다.
“널 믿었어, 넌 내가 하는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 박고 싶잖아?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이런 배신을 때리지? 내가 분명히 비렛을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어떻게…….”
“넌 내가 약 빨았다고 눈도 제대로 못 뜰 줄 알았냐? 야.”
강하게, 다비드가 사웅의 목덜미를 끌어내렸다. 마주하던 입술이 귓가에 닿았고 더운 숨이 귓바퀴를 거칠게 훑었다. “약속이 다르잖아, 이러면 내가 너랑 자줄 수가 없어.” 그리곤 길게 웃는다. 그 소리가 꼭 흐느끼는 것 같다고 사웅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