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에서 이어지는 글
가족 같은 소릴 한다고 생각했다.
비렛에게 가족은 언제나 무의미했다. 바랄 때는 없었고 바라지 않을 때는 귀찮을 만큼 들러붙었다. 좋은 가족이었던 순간은 조금도 없었다. 늘 불안했고 우울했고 답답했다. 특히 형제라는 단어는 더욱이.
형제라는 단어는…….
“씨발, 개 같아서 진짜.”
손이 떨렸다. 피울 담배도 없으면서 손을 들어 입가를 세게 눌렀다. 현관문에 등을 대고 신발을 신은 채로 주저앉았다. 토할 것 같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내장까지 토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될 수 있으면 평생 듣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말을, 특히 그들의 입으로는 더욱 그랬다. 겨우 쌓아 올린 관계였다. 싫은 말을 해도 어깨 한번 툭 치고 나면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농담을 나눴다. 바라는 것도 없었고 실망하는 것도 없었고,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그런 관계.
널 오빠처럼 생각한대. 새 가족이 생겼다고 생각할 거야.
왜? 그게 왜 필요한데?
가족은 지겹다. 형제는 신물이 난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해봐도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그것들은 끈적하고 불쾌하다. 귀가 울렸다. 들리지 말아야 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잘됐네, 렌, 동생이 생겼구나, 이젠 외롭지 않을 거야. 그런 멍청한 소리가 머리를 맴돈다. 구역질이 났다. 신발을 신은 채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한참 속을 게워 내다 예전에 일하던 가게에서 알고 지내던 마담의 전화를 받았다. 벌써 좀 마셨나보다는 말이 반갑기 그지없다.
「지금 좀 올 수 있나 해서. 중국인 사장이 너 찾는다.」
“그냥 관뒀다고 말하라니까.”
「야, 씨, 저 누나가 쓰는 돈이 얼만데.」
“그럼 남은 선수들보고 재롱 좀 잘 떨어보라고 하시든가요.”
드물게 아무의 부름도 없는 날이었다. 평일이었고, 무슨 일이 있는지 심심하면 연락하던 손님들도 오늘은 안부 문자조차 없었다. 꼼짝없이 혼자 보드카를 쏟아붓고 억지로 잠을 청해야 할 판이었는데,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관둔 가게에서 들어온 지명이라니,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사건이다.
그래서 조금 더 튕겨볼 생각도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 한 시간만 달라고. 준비하고 가겠다고. 그 얘기를 하는데 어찌나 신이 나던지 메슥거리던 속도 금방 가라앉았다.
공들여 머리를 정리하고 향수를 진하게 뿌린 뒤 막 집을 나가려는데 예상에도 없던 손님이 들이닥쳤다. 예고도 없었고,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이었던 터라(자세를 보아하니 초인종보다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려 했던 것 같았다. 어쨌든 모두 미수에 그쳤기에) 하마터면 비렛은 소리 죽여 찾아온 손님의 콧등을 뭉개버릴 뻔했다. 이브의 콧대라면 제 코를 내어주는 것으로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타니아라면, 일이 조금 복잡해진다.
“아, 씨, 깜짝이야!”
“내가 할 소리예요, 왜 거기 있어요?”
“내가 할 소리는 내가 할 소리지. 여긴 내 집이고 나가려던 참이고!”
그러나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상대방의 태도도 안하무인이니 마음이 편해졌다. 순간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숨을 길게 내쉬며 비렛은 타니아에게 손짓했다. 그가 한 발 안으로 들어왔고, 이내 문이 닫히는 도어락의 멜로디가 들려왔다.
그래, 뭔데. 현관문에 어깨를 기대며 비렛이 말했다. 수면바지 차림으로 들이닥친 걸 보니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거나, 아니면 초를 다투는 긴급 상황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거기다 양손으로 핸드폰을 꼭 쥔 걸 보니…….
“안으로 안 들여보내 줘요?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까 참을성 없는 불륜 커플 같다.”
급한 일은 아니겠다. 비렛은 기꺼이 소파를 내어주었다. 완벽한 불륜 커플 루트를 타려면 술도 한잔 내놓아야 했지만 아쉽게도 남은 술은 무드 없는 맥주가 전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니아의 불륜 상대가 되는 건 위험했고, 또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제발 그런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라, 진짜가 될까 봐 무섭다, 그렇게 진담을 섞어 진담을 말했다. 보통 이런 흐름이라면 이브가 옆에 있든 말든 타니아도 장난스럽게 까짓거 죽을 때 같이 죽어준다는 식의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소파에 앉으랬더니 말은 듣지도 않고 좁은 집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녔다. 문 없이 기둥 같은 벽으로만 나뉜 거실과 침실을 샅샅이 뒤지다 결국 화장실 문까지 벌컥 열어버린다. 심지어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온 수납장이며 선반은 죄 열어젖히는 게 아닌가. 뭐 잃어버린 거 있냐고, 찾아야 하는 거 있냐고 그렇게 묻자 비렛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타니아가 인상을 조금 구기며 이렇게 물었다.
“혹시 이브 여기 안 왔어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릴 한다 싶었다.
“네가 여기 없는데 걔가 여기 왜 있어?”
“갈 만한 데가 없으니까요. 둘이 술이라도 마시고 있는 거 아닌가 했지.”
“그럼 너랑 같이 왔겠지.”
“그런가, 그렇겠죠, 그래도…….”
혹시 지금 찾는 게 물건이 아니라 이브냐고, 비렛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타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와 헤어진 건 한참 전의 일이다. 머리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덜 들었으니 40분이 조금 안 되었다. 타니아가 얘기한 아이스크림 사러 다녀올 시간으로는 상당히 긴 시간이다. 급한 일이 생긴 거라면, 그래도 전화 한 통 못 하진 않을 것이다.
“알 만한 사람들한텐 다 연락해 봤는데, 모른대요. 가장 마지막 연락도 다 나랑 같이 있을 때 했던 거고요.”
비렛은 잠시 생각했다. 흐름대로라면 가장 마지막으로 이브를 만난 건 비렛 자신이다. 그가 들은 말 중 이 사건의 단서가 될만한 말이라면.
너희 전에 했던 얘기 말이야. 그렇게 운을 떼자 타니아가 인상을 더 짙게 쓰며 물었다. “해물짬뽕 먹었다는 거요?”
“…말고. 나랑 한 얘기 말하는 거 아니야. 너희 또 싸운 거.”
“우리가? 아냐, 안 싸웠어요.”
“아냐, 싸웠어. 적어도 넌 모르는 사이에 이브 혼자 싸웠어.”
“비렛, 제발. 나 지금 장난칠 시간 없어요.”
“장난 아니야. 젠장, 그럼 이브가 네 연락 안 받는 것도 말이 돼.”
Amigo. 타니아가 연 옷장 문을 닫으며 비렛이 말했다. “그게 걔가 아는 유일한 스페인어야.”
비렛은 전화를 켜 드웬의 번호를 찾았다. 다른 친구들한테 간 게 아니라면 그가 찾아갈 상대는 거의 유일했다. 거의 새벽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상식적으론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시간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통화를 연결하려는 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짧게 한 번, 길게 여러 번… 그러다 이내 전화가 끊기고, 지금은 통화가 어렵다는 안내 음성이 뒤를 이었다. “뭐야?” 이 급한 때 대체 뭘 하는 건지, 설마 자는 건지, 허망하게 연결에 실패한 전화기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타니아가 몸을 기울여오며 물었다. 뭐가 잘 안돼요? 나 때문이래요? 그 멍청이가 이제 집에 안 들어온대요? 어지간히 불안한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첫 장부터 최종장까지 단숨에 써 내려간다. 마음은 이해하겠다만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비렛은 다른 전화번호를 찾았다. 드웬이 안 된다면 드웬의 옆을 지키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 그는 비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연결은 어렵지 않았다.
비타와는 전화를 자주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어떤 식으로 전화를 받는지 비렛은 잘 모른다. 그래서 낮고 차분한 「비렛?」이란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도 ‘빌어먹을 드웬 자식은 왜 딴짓을 해서 나랑 비타를 귀찮게 구는 거야’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어, 나야.” 비타의 부름에 그렇게 답하며 혹시 지금 이브가 너희랑 있냐고, 물어보려 하는데 그보다 먼저 비타 쪽에서 빠르게 말을 걸어왔다. 마치 연락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기세였다.
「들었어요?」
“뭘 들어, 타니아 호들갑? 더 늦으면 내가 죽을 거란 소식?”
「모르고 있군요. 타니아 지금 비렛이랑 같이 있어요?」
“비극적이게도. 뭔데. 무슨 일인데?”
잠시 소란이 일었다. 비렛 쪽에서는 안절부절못하며 영 진정하지 못하던 타니아가 핸드폰을 떨어뜨렸고, 전화 너머에선 드웬과 비타가 급하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비렛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타니아를 좀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브는 드웬이랑 얘기 중인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일단 먼저 자고 있으라고, 그렇게 말하려 타니아 옆으로 등을 기대어 앉으려는데 전화 너머에서 불길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브,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대답 좀 해. 희미하지만 또렷한 드웬의 목소리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비렛은 기대려던 등을 다시 기울여 전화에 집중했다. 상황은 진행되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만약 이게 추리 게임이라면 무슨 개 같은 진행이냐며 욕을 먹어도 모자란다. 그러나 지금은 전화에 대고 시원하게 짜증을 부리지도 못한다.
타니아가 보고 있다. 여전히 미간의 힘을 풀지 못한 채로 전화를 붙잡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브, 이제 날 떠날 거래요? 그런 질문이나 하며 제 어깨를 붙잡는 사람 앞에서 드웬이 큰 소릴 낼 만한 일을 설명하라고 다그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전화 너머에 집중하면서 비렛은 대충 적당한 말을 생각해 내려 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면. 삽질에 빠진 나머지 술독에 빠져 동네를 돌아다니다 가로등이랑 스파링을 하는 거라면, 그리고 그 주인공이 비렛이 아닌 이브라면 드웬이 다급하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만도 했다. 비타의 반응이 좀 걸리긴 하지만, 타니아 얘기를 물어봤으니 지독하게 쪽팔린 연애 놀이를 괜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렛, 듣고 있어? 제이가 널 찾아. 론고가 그랬대. 사웅이가 널 데려가려던 걸 이브가 대신 갔는데 지금 충돌 사고가 일어난 것 같아. 이브하고는 내가 연락을 유지하고 있을게. 넌 론고 쪽을 알아봐.」
다급한 목소리로 드웬이 정보를 쏟아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비렛은 입고 있던 재킷을 타니아의 어깨에 둘러주며 전화 너머를 향해 말했다. “알았어. 귄트한테도 연락해 봐. 타니아는 아저씨한테 부탁할게.”
제이. 드웬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칸델라에서 함께 도망쳐 나온 이들이 비렛 앞에서 좀처럼 꺼내려 하지 않는—사실 꺼낼 이유도 없는—이름이 드웬의 입을 통해 나왔다.
제이에 대한 추억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사실, 기억도 얼마 없다. 있어봤자 한나의 옆자릴 차지하지 못해 안달을 내던 모습 정도였다. 예를 들어 카페에서 겨우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애인(그땐 제이가 한나의 애인이었으니까)이 혹여 바람을 피우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모습이라든가. 그리고 마지막 그 순간.
그때의 기억도 점점 흐려진다. 분명 한나와 싸웠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이젠 잘 모르겠다. 뭐 때문에 그토록 외롭고 억울했는지는 아마 당시에도 잘 모르지 않았을까. 그냥 서러웠다. 그래서 깜박 속아 넘어갔다. 제이를, 한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려다 실패하기 직전에 놓인 사업가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같은 여자에게 버림받은 동지라고만 여겼다. 가엾다, 불쌍하다, 이해한다,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고.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의 옆자리에 앉아 목이 졸리면서부터 든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았다. 희미한 의식 끝에서 제이의 머리가 터져 흩어지는 걸 볼 때도. 조금 다른 걸 떠올리고 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의문이 풀리는 건 아니니까.
일단은 현재를 생각해야 했다. 전화를 끊고 비렛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모자며 선글라스를 타니아에게 전부 씌우고 방의 불을 껐다. 도어락의 건전지도 전부 빼 두었다. 그리곤 속삭이듯 타니아에게 말했다. 핸드폰 무음으로 하고, 큰 소리 내지 말고 나만 따라와. 가슴이 울리지도 않는 바람 같은 목소리로 얘기하길 마친 뒤에는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계단으로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올 때까지 타니아도 지시대로 조용히 비렛만을 따라갔다.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며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에 따라갔다보다는 끌려갔다는 말이 더 어울렸지만, 어쨌든 불평 없이 잘 동행해 주었다. 건물을 나서 비렛이 멋대로 길을 정할 때도, 타니아의 보폭은 생각하지도 않고 빠르게 걸어갈 때도 그랬다. 그러나 신호를 기다리지도 않고 건너다 달려오던 자동차의 경적이 크게 울렸을 때, 타니아는 결국 터뜨리듯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는데 빠른 걸음 때문인지 아니면 감정 때문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위험한 거죠?”
아니야. 그렇게 말해야 했지만 하지 못했다. 사실이 아니었고 타니아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말을 골랐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해요?”
“그냥 조심하는 거야.”
“이브는요, 이브도 괜찮아요?”
모른다. 장담할 수 없다. 비렛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목덜미에는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다. 흉이 잘 남지 않는 피부라 다른 상처는 거의 찾기 힘들지만 몇 군데 남아있는 게 있다. 그중 목덜미의 것은 제이가 그에게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작고 단단한 나이프는 경동맥까지 닿진 못했다. 생각보다 멍청했거나 힘이 약했거나, 아니면 감정에 휘둘려 제대로 찌르지 못했거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 답은 알 수 없다. 그래도 어쨌든 목덜미를 그었으니 시각적인 충격은 대단했다고 나중에 드웬이 말했다. 피가 흥건해서, 네가 이미 죽은 줄 알았어.
아마 제이는 정말 죽이려고 칼을 들었을 것이다. 정말 죽길 바랐고 그렇게 되도록 행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이콥 프라우드 주니어의 아버지인 제이콥 프라우드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남자를, 비렛은 자주 만나진 않았지만, 징그러울 정도로 끈질긴 남자라고 생각했다. 제 아들을 죽인 것으로 동맹 포기 선언을 대신한 한나를 여전히 프라우드의 일부로 여겼다. 그는 언제나 그들의 주변에 있었고,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당신 때문이지?”
결국 그랬던 걸까. 한나가 제이를 죽인 건 결국 비렛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까.
“당신 때문에, 이브가 위험한 거지?”
“…아저씨네로 가자. 아저씨는 너처럼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럴싸하게 둘러대는 것도 단단하게 경직된 어깨를 다정하게 풀어주는 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걸음만 서둘렀다. 이브가 곁에 있었다면, 타니아가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내일을 준비하며 일찍 잠에 들었던 야마다 헤어지(일단 지금은 이런 이름을 쓰고 있으니, 이 이름으로 본인을 소개하는 데 어색함은 없다)는 새벽, 울려대는 벨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야마다가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경우는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예로 이제 다섯 살이 된 골든 리트리버 유타가 뭐에 놀라거나 해서 발소리를 내며 돌아다닐 때라든가, 야마다의 옆구리를 코끝으로 쿡쿡 찌르며 이불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든가, 천둥이 크게 치는 날이거나 하면 평소엔 잘 짖지도 않는 녀석이 컹, 하고 소리를 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날에는 아무리 늦거나 이른 시간이어도 뻑뻑한 눈꺼풀이 스르륵 뜨이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이유로 눈이 뜨였다. 그의 옆에서 유타가 부채 같은 꼬리를 흔들고 있기는 했지만 뭔가 바라고 하는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를 알리고 있었다. 가령 탁자에서 열심히 울려대는 핸드폰 같은 걸 말이다. 익숙한 알람 소리는 아니었다. 무슨 일일까, 화면을 확인해 보니 전화가 오고 있었다. 한참 잘 시간에 자길 찾는 걸 보면 어지간히 급한 일인 것 같았다. 야마다는 화면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유타 동생’. 비렛이었다.
비렛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가끔 장난을 치다가 마음이 동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심심하다, 술이나 한잔하자, 뭐 이런 이유로 시시한 연락을 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상대가 야마다라면 더욱 그랬다. 찬성이나 이브 같은 애들은 미국에서 살 적부터 친구였다 하니 오히려 연락을 안 한다면 좀 의아해진다. 그러나 야마다는 다르다. 한국에서 살다가 만났더니 어라, 외국인이더라. 그 정도 공통점뿐이라 이런 시간에 대뜸 전화를 한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취했거나, 비렛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핸드폰을 쓰고 있거나.
무시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다 곧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목소리가 잠기운에 꽤 갈라져 나왔지만 알아듣는 데에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렛은 은근히 말에 재능이 있었으니까. 가끔 야마다가 급하게 서툰 한국어를 꺼내도 비렛은 곧잘 알아들었다. 야마다도 이브나 다른 친구들의 서툰 말을 잘 이해했지만 그거야, 벌써 여기서 지낸 세월이 고향에서 지낸 세월과 맞먹어가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이 영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녀석이 영어를 하나 의심도 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의 한국어는 명확했고, 구조가 복잡하지도 않았다.
「지금 집 앞이야. 아저씨, 문 좀 열어줘.」
그러나 평소의 비렛이라면 절대 꺼내지 않을 말을 비렛의 목소리가 내뱉고 있었다. 그래서 상황을 이해하기보다 야마다는 다른 확신을 했다. 사기꾼이다. 요즘 기술을 이용해 중년을 떼먹으려는 나쁜 놈이다. 어느 나라나 젊은것들은 싸가지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야마다는 현관 모니터를 켰다.
문밖에는 정말 비렛이 서 있었다. “이게 왜 진짜지.” 야마다는 당장 문을 열었다.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진한 향수 냄새가 났고, 머리도 세팅이 무너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셔츠는 구겨졌고 재킷은 입지도 않았다. 야마다는 그의 품 안에 안기다시피한 여자를 보았다. 제 머리보다 훨씬 큰 모자로 얼굴이 가려져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비렛의 재킷을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확실했다. 여자였다.
그렇다면… 대충 예상이 간다. 야마다는 여전히 뻐근한 눈가를 손으로 누르며 물었다.
“…애 생겼냐?”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정답인 줄 알았는데. 비렛 대신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여자에 야마다는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아니라 저놈이 워낙 양아치라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익숙하다. 야마다는 미간에 힘을 주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 톤, 발음, 어투……. 틀림없다. 이건 타니아의 것이다.
“세상에. 너인 줄 몰랐다. 내가 이브에게 죽겠군, 미안하다.”
정말 끝내주는 농담이 될 뻔했다. 재빨리 정신을 차리며 두 사람을 방 안으로 들였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야마다는 손님을 밖에 세워두기만 하는 걸 예의라고 배우지 않았다. 뭘 내어주는 것까지야, 시간이 시간이니 녀석들도 딱히 바라는 건 없을 것이다. 술을 마시자고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 주인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유타 녀석만 신나서 꼬리를 흔들어대는데,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
들어오라는 말에 두 녀석 중 누구도 선뜻 신발을 벗지 않았다. 그런 말이 없어도 벌써 소파나 식탁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떠들어야 할 녀석들이 지금은 야마다의 실수를 물고 늘어지지도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조용하다. 그리고 머릿수가 적다.
이어지는 방문객 없이, 비렛은 타니아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영어인 것 같았다. 야마다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후 타니아가 귀여운 슬리퍼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온 걸로 보아 설득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안녕, 아저씨. 라는 순서가 어긋난 타니아의 인사에 야마다도 한숨 섞인 목소리로 어서 오라고 환영해 주었다.
의무는 끝났다. 야마다는 여전히 현관을 차지하고 있는 비렛과 마주했다. “그래. 어쩐 일이냐?” 고집을 피우며 서 있을 거라면 그대로도 좋았다. 무례에 대한 핑계도 서서 들으면 그만이다.
“얘 좀 데리고 있어 줘.”
그리고 비렛은 핑계도 설명도 아닌 부탁을 던졌다. 야마다는 유타의 인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보는 타니아를 어깨로 가리켰다.
“저 애를? 이브는 뭐하고?”
“일이 좀 생겼어.”
“그러니까 무슨 일. 얘기해줘야 나도 결정을 하지.”
야마다가 그들을 알기 훨씬 전부터 그 둘은 늘 함께 다녔다. 연애에 대한 사고가 좁은 사람이라도 두 사람이 각별한 사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숨기지 않았고, 아마 숨길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브의 안부는 타니아가, 타니아의 안부는 이브가 전해 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결코 서로를 혼자 두지 않았다.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 대타를 지금 부탁하고 있다. 타니아가 혼자라는 것보다 훨씬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일을 비렛은 “그냥, 좀 그렇다고만 알고 있어 줘.” 정도로만 넘어가려 한다. 그리고 야마다는 이 정도로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자의 표정을 안다.
“이브도 여기 오냐?”
비렛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올 수는 있어?”
이번엔 고개도 젓지 않았다. 대답도 없고 시선도 맞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역으로 가장 좋은 설명이 되었다. 야마다는 추궁하길 그만두었다. “그래, 알았다.” 그래서 용서하기로 했다.
하지만 타니아는 아니었다. 야마다의 용서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비렛에게로 달려들었다. 양팔을 뻗어 어깨를 밀치고 소리쳤다. “깡패 새끼!” 그 목소리는 아주 낮았고, 거칠었고, 날카로웠다.
“양아치만도 못 한 새끼야! 아니라고 했잖아, 이젠 아니라고 너희 입으로 그랬잖아! 네가 대신 죽어, 잘 살고 있던 우리 언니 끌어들이지 말고 너 혼자 뒈져버리든지 하라고!”
울고 있었다. 모자와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야마다를 찾아오기 전부터 내내 울고 있던 것 같다. 소리 없이 삭여낸 울분을 팔을 휘두르며 전부 쏟아냈다. 비렛은 막지 않았다. 작은 주먹이 자길 때리고 짧은 손톱이 턱을 긁어도 가만히 서 있었다. 꼭 그러라고 하는 것처럼, 마음이 풀릴 때까지 원하는 대로 하라는 것처럼.
그래서 야마다가 대신 말렸다. 힘은 어마어마했고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지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필사적으로 타니아를 떼어냈다. 큰 소리에 유타가 불안해했고 근처 주민들이 신고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너희 계속 소란 피울 거면 내쫓을 거야. 그래서 결국 협박 같은 말을 내뱉었다. 다행인 건, 그 말을 타니아가 알아준 것 같다는 점이었다.
비렛을 때리던 걸 멈추고 타니아가 주저앉았다. 제 신발이 어지럽게 흩어진 현관에서 목을 놓아 울었다. 여전히 야마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렸지만 어렴풋이 이브를 부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난감했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여자애한테 시끄러우니까 들어와서 울라는 소리를 하기엔 야마다는 용기가 부족했다. 유타 핑계를 대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타니아의 등만 내내 쓸어주었다. 그리고 비렛은, 야마다의 그 모든 고민을 단 두 마디로 해결했다.
“알았어. 그럴게.”
호흡을 멈추는 것처럼, 타니아가 울음을 멈췄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다만 다행이었다. 야마다는 서둘러 타니아를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혔다. 그리곤 비렛에게도 손짓했다. 들어와서 물이라도 좀 마셔라.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자리를 비렛은 부탁으로 채웠다.
“아저씨, 나 혼다 좀 빌려줘.”
이 밤중에, 불안해서 물가에도 못 내놓을 놈이 불안한 소리를 한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힌트라도 주면 좋으련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토바이 키는 문 옆 바구니에 있었다.
“면허는 있냐?”
“그 정돈 있어.”
“어디까지 가는데?”
“아직 몰라.”
“짜식, 부탁할 땐 빌려줘가 아니라 빌려주세요, 하는 거야.”
“…미안.”
야마다는 지난날, 자신을 맞이하고 보내준 많은 어른들을 떠올렸다. 제게는 그들과 같은 순간이 오지 않을 거라 건방지게 생각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가끔은, 담배가 주는 위안이 그리울 때도 있다.
야마다는 열쇠가 든 바구니를 가리켰다. 멀리 갈 거라면 중간에 주유를 한 번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도 덧붙였다. 내심 기름 하나 제대로 채워놓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알았다는, 고맙다는 인사뿐이다. 이런 깍듯한 비렛이 야마다는 무섭다. 그가 문 너머로 사라지기 전 서둘러 외쳤다. “꼭 돌려줘라.” 비렛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도 돌지 않은 채로 말했다.
“미안해.”
두 번의 사과를 끝으로, 비렛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