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날을 잊지 못하지만, 그 날도 유독 잊지 못한다.
여름이 유독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고용주가 보내준 사진 속 익살맞은 소년은 어디 가고 파리한 청년이 앉아 한 팔에 깁스를 두른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뱃재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어쩌면 신경도 쓰지 않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사는 일방적이었다. 미스터 리, 맞으십니까? 한나 칸델라의 요청으로 찾아왔습니다. 이벨리나 그린, 앞으로 당신의 경호를 맡을 사람입니다. 오른손을 내밀며 이브는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담배를 물고 있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이브를 보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작은 갈색 눈동자를 내민 손으로 움켜쥐면 빗줄기보다도 더 찬 물이 터져나올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경호원이래서 재미 없는 아저씨가 올 줄 알았는데, 여신님이 오셨네.”
그래서 그 말을 여전히 기억한다. 녹아 사라지길 기대하는 것처럼, 남자는 내민 이브의 손에 제 뺨을 기댔다.
Permítanme presentarles a mi más preciado amigo y compañero de toda la vida.
제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평생의 동반자를 소개하겠습니다.
“Mamá, ¿cómo has estado? ¿Has comido?”
쓰레기를 내놓고 오니 타니아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미국의 연은 전부 끊어낸 이브와 달리 타니아는 여전히 가족과 연락을 하며 지냈다. 무슨 얘기를 하는 지는 모른다. 그들은 이브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눴다. 화면을 보고 말하는 타니아도 화면 속에서 말하는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브는 때때로 타니아가 인사를 시키거나 할 때 가볍게 웃는 정도로 소통을 끝낸다. 몇 번인가 그렇게 했더니 이젠 타니아도 억지로 핸드폰을 들이밀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도 애인 가족인데 너무 박하게 굴었나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딱히 상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언젠가, 둘이 드웬의 지원(정확히는 그 뒤의 다른 누군가의 지원)을 벗어나 독립하게 되었을 때 화면 너머로 타니아의 가족을 소개받은 적이 있다.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한참 짐을 옮기는 자신을 급하게 부르길래 무슨 일인가 달려갔더니 핸드폰을 가리키며 타니아가 말했다. 우리 엄마야. 그 말은 영어였고, 그래서 이브는 애인의 엄마 얼굴을 안다. 그러나 이후로 이어지는 타니아의 말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직 단 한 단어.
Amigo. 타니아는 이브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화면 속의 여자는 축하한다는 영어 단어를 짧게 외쳤고, 타니아도 그의 뺨에 가볍게 키스해주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통화가 끝나고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물었더니 타니아는,
“비밀!”
이라며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확신했다. 타니아의 엄마가 축하한다는 영어 정도는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브도 친구라는 스페인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타니아는 유독 비렛을 잘 따랐다. 만나게 된 것도 비렛이 계기였다. 타니아가 그의 엉덩이를 더듬어 지갑을 훔쳐가려던 걸 이브가 발견했고, 그걸 저지하면서 두 사람의 눈이 처음으로 맞았다. 그랬다. 말로 하자면, 좀 우습긴 했지만, 타니아의 손목을 먼저 잡은 건 이브였으나 타니아가 먼저 만진 엉덩이는 이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그는 늘 생각한다. 단순히 비싼 옷을 입은 사람의 지갑을 가져가려던 것이라고, 단순히 더 멍청해보이는 쪽을 노렸던 것이라고, 애초에 마음이 있는 시작이 아니었다고 혼잣말로 달래도 보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 잠잠해지기엔 타니아는 여전히 비렛을 좋아했다.
솔직히 비렛이랑 한 번쯤 자 보고 싶었다.
타니아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남들이 놀란 만큼 놀라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술김에 나온 말이었지만 사람은 술김에 더 진실된 속내를 털어놓곤 한다. 드웬은 마시던 술을 그대로 뱉었고 론고가 소리를 질렀으며 그 얌전한 비타도 쉴 새 없이 이유를 물어댔는데 이브는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마음이었다.
“너 이브랑 사귀는 거 아니야?”
“지금은 그렇죠, 어렸을 땐 남자랑도 연애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잤어?”
“남자랑?”
“아니, 비렛이랑.”
“이거 재밌다, 돈 다 내고 잤어, 지인 할인가로 잤어?”
“질문 뭐지? 미친건가?”
마침 비렛이 화장실 갔으니까 하는 얘긴데. 쏟아지는 질문에 타니아는 도톰한 입술을 씩, 끌어올리며 그 가운데로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딱히 비밀은 아닌데 그래도 비밀이에요. 그렇게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타니아가 그 순간에도 귀엽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젠 별로. 아, 비렛이 싫다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좋아해요. 꼭 오빠가 생긴 것 같아서, 그런 느낌으로 좋아해서 자고 싶단 생각은 안 들어요.”
드웬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비드가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고, 비타가 어쩐지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였을 때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니아가 왜 제 애인으로 있어주는지, 그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 같았다. 후에 돌아와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타니아의 비밀도 전부) 비렛은 담배 냄새가 남은 코웃음을 치며 “어이가 없네. 난 이브 저 놈한테 하자고 한 적 있어. 근데 자긴 여자랑만 잔대서 바로 유턴했지.” 라고 떠들기 시작해서, 미쳐 돌아가는 화살표의 이야기는 결국 뉴욕에서의 추억 이야기로 마무리 되었다.
“아들 내외가 급하게 들어오게 돼서, 미안하지만 이번달 안으로 정리해줄 수 있을까?”
급하게 할 말이 있다던 집주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는 거짓말이었다.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안 하고 있었다.
처음 두 사람을 받아줄 때 미국에 있는 아들이 생각나서 보증금을 흔쾌히 깎아 준 사람이었다. 영어를 잘 했고, 마음씨도 좋았다. 타니아는 집주인을 Mama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정말 가족처럼 지내지는 않았지만, 종종 반찬이나 간식거리를 주고받는 정도로는 친하게 지냈다. 건물의 간단한 정비가 필요할 때 이브가 돕기도 했다. 어느샌가 집주인을 부르는 호칭이 부인에서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런 사람이 이토록 간절하게 부탁을 한다. 처음엔 따지기도 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며 집이 그렇게 덥석 구해지는 거냐고 언짢은 티를 내기도 했다. 거기에 맞서 집주인도 당장 방을 빼라며 신경질을 부렸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집주인은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며 그들에게 투명한 플라스틱 파일에 담긴 종이 몇 장을 보여주었다. 이브와 타니아는 종이를 찬찬히 넘겨보았고, 냅다 비명을 질러버렸다.
“변명 하지 말고. 진짜 목적이 뭐야?”
“있으면 좋겠다. 우리도 피해자야, 정말 결백해.”
“이딴 우연이 어디 있어, 드라마 찍냐? 드라마도 이따위로 찍으면 구라 깐다고 욕 먹어!”
“에이,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 거 아니겠어요? 어쨌든 잘 부탁해요, 아랫집 오빠~”
“쟨 뭐가 저렇게 긍정적이야? 뭐가 다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워?!”
집주인이 자기가 잘 얘기해두었다며 좋은 방을 찾았다고 보여준 평면도의 주소는 이브에게도 낯이 익었다. 설마해서 언젠가 비렛과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알파벳과 한글이란 차이일 뿐 그 내용은 숫자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같았다. 우리 여기 가본 것 같아요.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이브가 말하자 집주인은 박수까지 치며 반가워했다. 그래, 거기 아랫집 총각도 영어 쓴댔어. 두 집이 친하게 지내봐.
“도대체 왜 너희 커플은 날 못 괴롭혀서 안달이냐고!”
“웃긴다? 우리가 널 괴롭히냐? 상황이 그렇게 된 걸 어떡하라고.”
“이사 갈 거야. 한국 뜰 거야.”
“잘 가, 돌아오지 마.”
“진짜 왜들 그래요! 그러지 말고 우리 오늘 저녁 뭐 먹을래요? 짜장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러니까 그놈의 보증금이 문제였다. 월세는 어떻게든 급하게 해결할 수 있다 해도 몇천만원 씩이나 되는 돈은 당장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절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서류에 서명을 하며 이브는 굳게 다짐했다. 돈을 벌어야지. 돈을 벌어서 이 거지같은 서울에 나랑 타니아가 도란도란 지낼 번듯한 방 한 칸 얻어내야지. 이사 준비를 하면서도 얼마나 타니아에게 미안하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타니아는 괜찮다고, 이건 우리 둘 모두의 문제라고, 너 혼자 전부 떠맡아야 할 게 아니라고 위로해주었지만 이브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이브는 마음이 조금씩 달라졌다. 전에 살던 집에선 아닌 척 해도 이웃들의 눈치를 봤던 것 같다. 왜 ‘것 같다’라 하느냐면 이사 오기 전까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 성격이겠거니, 소란스러워 보여도 얌전한 구석이 있는 아이겠거니, 하고 넘겼던 부분을 며칠 새 보지 못했다. 틈만 나면 타니아는 아래층으로 향했고 그럴 때마다 다양한 감정을 안은 채 돌아왔다. 이토록 생기 넘치는 타니아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몰랐다. 분명 좋은 일이었다. 분명 좋은 일인데.
“레즈 커플에 남자 난입은 욕 엄청 먹는데.”
“난입은 저 쪽에서 했지. 웬 남자 인생에 레즈 커플 난입이잖아, 지금.”
“그럼 뭐 먹어?”
“부러움.”
“시기.”
“질투.”
“짜장면.”
“쟤 저번부터 짜장면 얘기하던데 좀 사줘라.”
“사줬어. 해물짬뽕 먹었어.”
이브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빠르게 단념했는지도 모른다.
그날도 타니아가 신나게 비렛을 괴롭히고 올라왔다. 복도가 시끄럽길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담배 피우러 가는 김에 아이스크림 사다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게 아닌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느냐고 물어보니 그건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 짜증 내는 게 재미있어서 한 말이란다. 그럼 아이스크림은? 하고 물어보니 시간을 가리켰다. 이제 자기도 곧 삼십 댄데 아이스크림 아무 때나 먹으면 살 찐단다. 듣는 삼십 대 서럽다고 농담을 하면서 이브는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로비 밖 흡연 구역에 삐딱하게 서서 담배를 피우는 비렛이 보였다. 이브의 첫 인사는 “수고가 많다.” 였다.
“알면 네 여자 친구 설득 좀 잘 해 줘라. 요즘 피곤해서 일을 못 하겠다.”
“내 예쁜 여친이 큰 일을 하려나본데 좀 당해줘라.”
“진짜 너네 짜증나.”
그렇게 말하며 툭, 담뱃재를 턴다. 의외로 비렛은 거짓말을 잘 하지 않았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언니 오늘 좀 예쁘다, 그런 립서비스는 종종 해도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비렛은 지금 진심으로 자신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렛은 대체로 친구들에게 짜증을 냈다. 이브는 느리게 걸어 비렛의 옆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사 오기 전까지 이브는 비렛의 짜증 난다는 말을 들으면 영광이라는 말로 받아치곤 했다.
“너무 그러지 말고, 그냥 지금처럼만 놀아 줘라.”
그러나 오늘은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장난처럼 넘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기대고, 낡은 슬리퍼를 바닥에 문지르며 이브는 말했다. 타니아가 귀찮게 굴고 그래도 그냥 적당히 받아주면서, 화만 내지 말아달라고.
“그 애가 엄마한테 날 친구라고 소개했어.”
그리곤 내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강둑이 버티지 못하고 강물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처럼 속에서 정리하지 못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비렛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내내 바닥을 문대는 슬리퍼만 바라보느라 표정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진심이든 홧김에든 지금 그 얼굴을 보면 분명 한 대 갈겨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네가 그때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했다고 외칠 것 같아서. 이브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싸웠냐?”
“뭘 싸우냐, 내가 걔랑…….”
“아니, 너네 존나 싸워.”
“그땐 안 싸웠어. 걔 엄마랑은 스페인어로 말해.”
“스페인어 못 해?”
“넌 해?”
“아니. 난 멕시코 출신 애인 없거든.”
“아, 맞는 말 하네.”
그리고 비렛은 냉정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이브는 매번 비렛을 멍청하고 덜떨어진 인간이라고 놀리곤 했는데, 막상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놈을 꼽아보라면 이브는 당장 비렛의 이름을 댈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싶었다. 그래서 타니아가 비렛을 좋아하나. 백인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부모 아래서 아무런 의문도 의심도 없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군사 훈련을 받으며 20년을 보낸 자신보다는, 현실을 볼 줄 아는 ‘인간’이 더 좋은 건 어쩔 수 없나.
그럼 정말 어쩔 수 없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말을 배울 생각도 않는 여자 친구 보다는 줄담배를 피워도 제 언어로 사랑을 속삭여주는 남자 친구가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 넌 애인이 외국어를 하면 배울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몸짓까지 해보이며 “Ci mancherebbe!” 라고 외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타니아가 널 형제처럼 생각해. 그 말은 비렛이 내뱉은 담배 연기보다도 허무하게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널 오빠처럼 생각한대. 아마 다른 애들도 그럴 거야. 드웬도, 비타도, 새 가족이 생겼다고 생각할 거야.”
비렛은 대답하지 않았다. 피우던 담배를 마저 느리게 빨아들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 앨 가족과 떼어놓은 건 나잖아. 어떻게 지낼까, 날 원망할까, 두려웠는데 너희랑 있으면 외롭지 않아 보여. 느꼈어? 너랑 같은 데 살면서 그 애 많이 웃는 거.”
“넌?”
이브는 으쓱, 하고 어깨를 올렸다. “난 친구고. 없어지면 금방 만들 수 있는 거.”
“타니아가 그렇게 말했어?”
잘 모르겠어. 그런데 아마 그럴 거야.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현실이 될까봐 두려워서,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덕분에 고개만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자세 흐트러트리지 말고, 등 똑바로 펴고, 하는 외침이 왜 지금 귀에서 맴도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한 모금, 길게 연기를 뱉은 비렛이 조금 남은 꽁초를 바닥에 던졌다. 그 행동은 신경질적이었고 작아서 들리진 않았지만 욕설 같은 걸 중얼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바로 이어지는 그의 말은 “가족 같은 소리 하네.” 였다.
“난 웬만해선 여자 하는 말에 좆 같다는 욕 안 해. 여자가 하는 말은 대체로 안 그렇거든. 근데 넌 지금 좀 그렇다. 많이 좆 같다. 엘리트라며. 공부 많이 했다며. 대가리에 그만큼 집어넣었으면 꺼내서 쓰는 법도 공부했어야지. 오밤중에 튀어나와서 친구고 가족이고, 아, 씨, 담배도 없는데 존나 맛없게 피웠네.”
그리곤 화를 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제 앞으로 다가오지도 않았고, 어깨를 밀치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이브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비렛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리고 건조했다. 날카롭고, 자신을 꿰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차고 깊은 물을 쏟아내는 건 이번엔 이브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생각해서 말하잖아, 타니아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말고 잘 좀 해 달라고. 일부러 아닌 척 덩달아 화를 내는 시늉을 했다. 자꾸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데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보다. “그 앤 네가 있을 때 제일 좋아 보인다고!” 그래서 배에 힘을 줬더니 비명 같은 소리가 나왔다. 타니아가 들었으면 어떡하지, 오히려 괜찮을까, 그것마저 무서워 눈을 감는데 멀어져가는 비렛의 꺼지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엘리베이터가 비렛을 옮겨 간 뒤였다.
우두커니 그 앞에 서 있었다. 집에 들어가지도,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지도 못했다. 그냥 그렇게 서서 비렛이 담배를 피우던 곳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비렛이 그때 죽었더라면. 타니아의 안에서 비렛의 비중이 사라졌다면. 그 자리를 자신이 대신 채울 수 있었을까. 그렇게 채워지는 자리일까. 반대로 자신의 자리는 누군가 대신 채울 수 있는 자리일까.
제 자리가 있기는 한 걸까. 담배 냄새가 남은 곳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스크림을 사 가야지. 더 늦으면 정말 안 먹을 텐데. 지갑만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이제 일어나자.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다가 일어나자. 게으름일지 망설임일지 모를 것이 발목을 그리도 잡아댄다.
그 덕분에 만날 수 있었다. 이젠 정말 가야 한다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이브의 눈에 후드를 눌러 쓴 사람이 보였다. 비렛 보다도 훨씬 키가 컸고 덩치는 배는 되어 보였다. 그런 사람이 성큼성큼 건물 입구 쪽으로 다가왔다. 저런 사람이 여기 사나, 타니아가 혼자 다닐 때 마주치면 무서워 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는데 후드 아래 얼굴이 어쩐지 익숙하다. 남자는 같은 건물의 주민이 아니었다.
“너, 사웅이 맞지?”
가끔 론고와 같이 다니던 남자였다. 빠르게 건물로 들어가려던 남자는 이브의 부름에 서둘러 발을 멈췄다. 누님, 하는 낮은 목소리는 여전히 어색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많은 일이 있긴 했다. “뭐, 그냥… 나 여기 살잖아.”
“예, 들었습니다.”
“론고한테?”
“…예, 그렇습니다.”
“둘이 좀, 진전이 있나?”
말이 없다. 이브는 사웅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야, 괜찮아. 원래 사랑이 다 그런 거야. 그런 누구에게 하는 말일지 모를 말을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내뱉는다. 비렛 말이 맞다. 오랫동안 재미 없게 살아오면서 머리를 쓰는 법 하나 배우지 못했다. 한심하다.
사웅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큰 덩치를 하고 땅만 바라보면서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다. 론고 얘긴 괜히 꺼냈나보다. 론고도 별 말 없었고(심지어 투정이 좀 줄어들었고), 사웅도 늘 같은 모습이어서 멋대로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래, 사는 게 힘들다. 그렇게 같잖은 위로를 하려다 주제를 바꿨다. 근데 너는 여기 무슨 일이냐, 그렇게 묻자 이번엔 입술을 좀 우물거린다. 이렇게 소심한 애가 어쩌다 조직엘 들어갔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어깨를 두드리던 손을 좀 부드럽게 하려 신경을 썼다.
“이 형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형. 사웅은 비렛을 그렇게 불렀다. 이브는 비렛이 조금 전 사라진 엘리베이터 쪽을 시선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방금 들어갔는데.” 그러자 사웅의 어깨가 미묘하게 움찔거린다. 그래서 일부러 물었다.
“왜?”
여전히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유독 이브와 그 멤버들을 대하기 어려워했다. 처음엔 좋아하는 사람의 주변 사람이니까 그런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유로 이렇게까지 무서워 할 리는 없다. 이브의 시선이 겨우 드러난 사웅의 입으로 다시 향했다.
다비드가. 우물거리는 사이에서 이름이 읽혔다.
“다비드가 만나고 싶어 합니다.”
“론고가?”
타니아가 비렛을 따르는 만큼 론고도 비렛을 곧잘 따랐다. 고향도 비슷하더니 노는 것도 비슷하다고 야마다 아저씨가 농담을 던진 적도 있었다. 먼저 만나자고 적극적으로 약속을 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서로 만나면 어색할 것 없이 잘 지냈다. 만나고 싶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웅이 처음 다비드를 쫓아다녔을 때 론고는 제일 처음으로 비렛을 찾아갔다.
그걸 왜 이렇게 감추듯 말을 할까. 이브는 사웅의 어깨를 조금 힘주어 잡았다. 그럼 직접 만나러 오면 되지, 왜 혼자 오고. 이브가 물었고, 사웅은 잠시 말이 없었다. 똑바로 말 해. 무슨 일 있지. 그렇게 추궁하면 도망이라도 갈 것 같아서 참았다. 입술에 침을 조금 바르고, 사웅은 숨소리를 섞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제이가 부른다고, 그렇게 말하면 올 거라고 했습니다.”
후드에 가려졌던 그의 눈이 이브를 바로 향했다. 제이라는 이름을 이브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론고 역시 칸델라의 사람이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브는 손에 쥔 힘을 빼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은 사러 가지 못할 것 같다. 타니아에게 늦게 들어갈 지도 모르겠다고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없는 자리를, 비렛이 대신 채워줄 수 있을 거라는 원망스러운 확신으로 고민을 애써 지워냈다.
“내가 비렛 가드야. 나랑 대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