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큰 잘못한 거야.”
“알아.”
“아니, 몰라. 아는 사람은 그런 말 못 해.”
토트리의 시간은 멈췄다. 조각난 연인의 시신을 끌어안았을 때부터 그의 땅은 자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해가 뜨건 달이 뜨건, 비가 내리고 그 땅이 마르건 토트리는 여전히 축축한 우물 아래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그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날이 시원해지면 또 보자. 래드포드가 그 말을 어기리라고는 생각도 않았다.
지금도 당장 저 문을 열고 전부 농담이었다며 차를 마시자고 그가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9월이 되었는데 레기한테서 연락이 없어. 바빠서 그런 걸까? 퀭한 눈을 하고 그런 말을 하며 커트의 옷자락을 잡았을 때, 그는 긴 숨을 쉬며 토트리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곤 귓가에 속삭였다. 레기는 죽었어, 케이트. 그 녀석은 이제 우리 곁에 없어. 머리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끓었고 살이 찢기는 고통에 크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애만 없었더라면, 그 인간 아이만 없었으면.
“레기는 네가 이러는 거 원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해도.”
“케이트.”
“그놈을 레기 대신 두아트에 던져 넣을 수만 있다면 난 그렇게 할 거야.”
“아니, 못 해.”
“해.”
“못 해, 케이트. 너도, 나도, 레기가 싫어하는 짓은 절대 못 해.”
시간과 함께 사고도 멈추었다. 방향을 갖게 된 사고는 줄곧 한 길만을 파고 내려갔다. 그 어느 말도 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커트가 신기했다. 그는, 물론 레기의 연인은 아니었지만, 토트리 못지않게 그와 시간을 보낸 동기였다. 메마른 눈가로 저를 가엾게 보기만 하는 커트의 옷깃을 붙잡고 물었다. 너는 그립지도 않냐고, 그 미소가, 손길이, 붉은 머리칼이 가슴에 가득 안기던 온기를 벌써 잊은 거냐고. 하얗게 떨리던 입술이 내뱉은 말은 단호했다. “그리워. 그래서 더 이러는 거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정신이 나갔다고만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녀석이 그렇게 웃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어. 아무리 폐하의 명령이라 해도 너나 나나 다 미쳤다고 했잖아.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는데 수락한 거야. 그거 알아? 레기 그 녀석, 언제부턴가 입만 열면 꼬맹이 얘길 했잖아. 우리 셋 다 나란히 자식이라고는 구경도 못 해봤는데 꼭 손주 생긴 할아버지처럼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서, 정말 행복해 보였어.”
“…….”
“행복해 보였어, 케이트. 녀석은 그 애를 참 아꼈어.”
“그게 죽을 이유가 되진 않아.”
“죽을 이유가 아니었을 거야. 레기는 그런 생각을 하는 녀석이 아니잖아. 분명, 지킬 이유를 찾았겠지.”
토트리는 상상했다. 비루가 죽고 난 뒤의 래드포드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늘 앉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을지. 네가 무사해 다행이라며 넓은 어깨를 끌어안는 토트리를 그는 시체 같은 눈을 하고 쳐다볼까. 커트의 말처럼 아이를 지켜야 했다고 할까.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말을 하든 그를 마주하는 상상을 하는 것은 황홀했고, 또 힘겨웠다.
“레기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랐어.”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워.”
“나도 그래.”
“날 비난하는 모습이어도 좋아. 살아만 있다면.”
“레기가 힘들어했을 텐데도?”
“…….”
“우리 이렇게 생각해 보자.”
잔뜩 웅크린 토트리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커트가 말했다. 그의 손은 래드포드만큼이나 컸다. 그 만큼 따뜻했고 그 만큼 거칠었다. 토트리는 래드포드의 거친 손을 좋아했다. 같이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제 얼굴을 만져줄 때는 늘 신경을 썼다. 굳은살이 생겨서, 거스러미가 올라와서, 주름 가득한 얼굴에 혹여 상처라도 날까 얼마나 조심하던지. 참 우스웠는데 그 행동을 커트도 똑같이 하고 있다. 이젠 하얗게 세어가는 금발을 큰 손으로 쓸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잊자는 말이 아니다. 잊을 수가 없다. 여생을 우린 레기의 추억과 함께 살아갈 테고 눈을 감는 순간 그의 곁으로 갈 수 있겠다며 기뻐할 것이다. 대신, 그날이 올 때까지 레기가 남긴 것을 아끼며 살아가자.
레기가 남긴 것이라니.
그 아이가 있지 않은가. 목숨을 내어가면서까지 지켜낸 비루가 있다. 나는 그 아이를 녀석의 자식쯤으로 생각하고자 한다.
자식의 자식 수준이다.
그건 무시하자. 대충 늦둥이라고 치면 몰입이 된다.
너도 아까 할아버지 같았다고 했다.
기억해 주니 기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비루는 녀석의 유산이다. 기회를 주고 떠난 것이다. 녀석은, 우리에게 미래를 맡긴 것이다.
커트의 손 위로 토트리가 제 손을 얹었다. 몸에 열이 돌기 시작했다. 넌 언제 그런 생각을 했어, 토트리가 물었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커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맞았다. 그의 말이 전부 맞았다. 잡고 늘어질 꼬투리 하나 없이 완벽했다. 근육이 떨렸고 숨이 나왔다. 가슴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되뇌던 만약이라는 엉킨 실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눈앞의 커트만이 오롯이 남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확신으로 빛난다. 연인인 저보다 친구인 커트가 더 래드포드를 잘 알고 있었다. 부럽다. 질투가 난다. 그 속내를 거짓 없이 전부 털어놓았다. 그러자 시원한 웃음이 큰 가슴을 울리며 터져 나왔다. 종종 래드포드와 커트 둘이서 이런 웃음을 함께 터뜨리곤 했다. 귓속에서 소리가 겹쳤다.
“사랑은 이성을 좀먹는 벌레와도 같다고 하지.”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놈이었구나.”
“나이 먹어서 그래.”
“난 할 줄 모르는데.”
래드포드도 커트도 토트리도 같은 시기를 살아왔다. 같은 환경에서 지내왔고 같은 농담을 즐겼고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멋대로 짐작했다. 토트리는 깊게 숨을 쉬었다. 이제 와서 혼자 일어서기는 너무 늦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주저앉아만 있을 수도 없다. 커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래, 알았어. 그가 대답했고, 서로의 체온이 옮아갈 만큼 오랫동안 끌어안았다.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그 애 엄마아빠 노릇을 해 주면 어떨까? 내가 아빠처럼 굴어주고, 케이트 네가 엄마처럼 굴어주고.”
“싫어. 동네 아는 할아버지처럼 대할 거야.”
“나 지금 고백 한 건데.”
“알아.”
“알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