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인간의 아이야, 날 악마에게 팔아넘긴 아이야. 나도 네게 선물을 주마. 우리의 마지막 왕이 네 심장에 말뚝을 꽂아 넣을 때까지 넌 그 어떤 온기도 느낄 수 없을 게다. 아무리 바라고 원하고 외쳐도 네게 들러붙는 건 원망과 배신, 증오, 시기와 질투뿐이리니 영원히, 네 심장이 뛰는 동안은 평생 웃지 못할 것이다.
귓가에 울리는 것이 실라의 웃음인지 제 비명인지 구분할 수 없다. 실라의 손이 파고든 눈두덩이는 그가 남긴 잿가루처럼 타는 듯이 뜨거웠고 몰아치는 밤바람은 살을 에는 듯이 차갑다. 이내 핏물 배인 아스팔트 위로 무너지고 만다. 이제 겨우 열다섯을 넘긴 소년의 입에선 어머니를, 아버지를 찾는 말뿐이 나오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발이, 몸이, 머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내 소년은 제 몸마저 악마에게 넘긴다. 멀어지는 정신으로 연신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낀다. 희미하게 잿가루의 냄새가 났다.
“그건, 대체 뭡니까?”
폐하와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각 지역의 사령관들이 전부 모이는 회의에, 여왕군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웬 애를 하나 데려왔다. 키는 작고 손이며 눈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부산스러워 보이니, 아무리 잘 입혀놓아도 재단사들의 수고만 더하는 꼴이다. 게다가 대체 뭘 하고 다닌 건지 눈 하나는 날려 먹어서 허연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다. 여왕군 제1부사령관 제프 오스만은 총사령관 뒤에 숨은 아이의 어깨를 세게 잡아당겼다.
“이리 내십시오, 적당히 지나가는 하인에게 맡기고 오겠습니다.”
손안에 들어오는 뼈대며 소리 한번 내지 못하는 몸뚱어리가 영 엉성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스만은 래드포드 총사령관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할 때가 있다. 도저히 폐하께 내보일 만한 물건이 아닌데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고 오신 건지, 마침 옆을 지나는 메이드를 손짓으로 부르는데 총사령관의 큰 손이 따라 올라왔다. 그리곤 오스만의 손을 다시 아래로 끌어내렸다. 건방지게 굴지 말게. 시종일관 미소로 대하던 총사령관은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직접 내게 맡긴 아일세. 왕족이 모두 보시는 앞에서 소개하라는 명을 받아 데리고 온 것이니, 그리 물건 다루듯 함부로 대하지 말게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커트 동부사령관의 장난에 거의 울먹거리던 아이를 블레나 여왕은 특임 기사라고 칭하며 모두에게 소개했다. 누구를 지키는 기사냐 물었더니 총사령관을, 나아가 여왕을, 즉 이 나라를 지키는 기사라고 했다.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몇 명의 부사령관이 일어나 외쳤고 여왕은 아이의 마른 등을 쓸어내며 말했다. 아니, 너흰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곤 얼굴을 덮은 안대를 천천히 벗겨냈다.
그 안에는 실라의 저주가 있었다. 검게 타들어 가고 말라붙은 오른쪽의 얼굴을 여왕은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아이는 내게 실라의 목을 바친 장한 아이다. 그 누가 이 아이에게 자격이 없다 할 수 있겠느냐. 회의장이 조용해졌고 래드포드 총사령관이 느릿하게 박수를 쳤다. 여왕군의 푸른 망토는 아이의 얼굴을 더 파랗게 할 뿐이다.
네 이름이 무어냐, 한 사령관이 물었고 아이는 작게 대답했다. “은비루예요. 갖출 비에 새길 루 자를 써요.”
“비루 너는 탄산을 참 좋아하는구나. 찬 것만 그렇게 마시면 배가 아프진 않니?”
“차는 싫어요. 맛없어.”
“요 녀석 말 하는 것 좀 봐라. 케이트가 얼마나 자랑을 한 보이찬데, 그러지말고 너도 이제 차 마시는 법을 배워두련.”
“색도 비슷한데 그냥 콜라 마실래요.”
“사실 내가 맛이 궁금해서 그래. 바꿔 마시자.”
“아, 새로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더운 날이었다. 나무는 푸르다 못해 짙게 우거졌고 하늘은 파랗다 못해 하얗게 끓었다. 그늘이 문제가 아니다. 커튼이며 창문을 전부 닫아놓고 에어컨을 틀어야 겨우 견딜 수 있을 여름이 섬에 찾아왔다.
섬에 오고 처음 여름을 맞이했을 때 비루가 유독 힘들어했던 것을 기억한다. 얼음이 든 음료수가 아니면 입에 대려고 하지를 않아 물을 줄 때도 컵에 물이 맺힐 정도로 차게 식혀 주어야 했다. 다 낫지 않은 상처는 종종 곪아들어갔고 덕분에 훈련을 몇 번인가 쉬었다. 그래서 한 가지 규칙을 정했다. 보름의 방학을 갖자. 가장 더운 여름의 15일을 시원한 곳에서 쉬고, 찬 바람이 불면 다시 땀을 흘리자. 그렇게 약속한 두 번째의 8월이었다.
어제로 딱 두 주가 지났다. 오늘을 넘기면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테고, 비루의 여유로운 방학도 끝이 난다. 블레나로 돌아가면 아침마다 래드포드의 손에 이끌려 연병장을 달리고 말을 타고 책을 읽어야 한다. 상처가 낫기 시작하고 거의 1년을 그렇게 지냈다. 10대가 되어서는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던 그였다. 순식간에 바뀐 생활에 힘들어하는 비루에게, 여왕은 섬에서는 거의 볼 수 없던 달콤한 바깥의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 판단은 탁월했다. 비루가 웬만해선 짓지 않는 환한 미소를 소리까지 내며 지었으니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여왕은 비루가 목말라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일렀다. 물론 양치질도 잊지 않도록 하고 말이다.
그런 즐거움을 래드포드가 빼앗으려 한다. 커트도 아니고 선생님이 이러실 줄 몰랐다, 배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비루가 칭얼대자 래드포드가 크게 웃었다. 실제로 커트도 지금의 래드포드와 같은 짓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도 비루가 음료수를 얻어 좋아하고 있었다. 한 모금, 막 입을 대려던 때 커트가 장난을 친답시고 냅다 뺏어 얼음만 남기고 거의 전부를 마셔버렸다. 이젠 그렇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단련해 온 움직임으로 잔을 지키려 했지만 래드포드에게 비루는 그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잔이 손에서 손으로 넘어갔다. 유일한 즐거움을 빼앗기려던 그때.
래드포드가 잔을 뒤집었다. 얼음과 함께 음료수가 바닥으로 쏟아져 옅은 거품을 일으켰다. 그와 몸싸움을 하던 비루도, 가만히 지켜보던 메이드도 놀라 눈만 둥그렇게 뜨는데 래드포드가 나지막이 한마디 읊조렸다.
너, 이 녀석이 이것만 마시는 걸 노렸구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칼을 휘둘렀다. 고작 보름 동안 지낼 별장에 동행인은 얼마 없었고 그마저 함께 온 닐은 하필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비루도 서둘러 칼을 들었다. 온몸이 떨리고 발은 엎질러진 음료수에 자꾸만 미끄러졌지만 주저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메이드였던 침입자의 목을 조르며 래드포드가 외쳤다. 심장을 찔러라.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비루는 달렸다. 동시에 침입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해방을 위해!” 녹슨 핀이 뽑혔고, 굉음이 뒤를 이었다.
비루의 칼은 뱀파이어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그리고 뱀파이어의 수류탄도 제대로 작동했다. 여전히 아득한 정신으로 비루는 바닥을 짚었다. “선생님.” 겨우 흘러나온 목소리에 손등으로 따뜻한 온기가 내려앉는다. 피부에 상처가 났는지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필사적으로 내려앉은 온기를 잡았다. 선생님은 무사하다. 그 사실에 요동치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귓가에 들려오는 건 전혀 다른 목소리다.
“정신이 들어요?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공손한 목소리에 비루는 서둘러 눈을 떴다. 눈꺼풀 한 겹 움직이는 데만 이상하게 힘이 든다. 밝은 빛이 터졌고 시야 옆으로 지나가는 인영이 보인다. 그리고 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금발이 보인다.
“닐. 왜 닐이…….”
“소리를 듣고 왔어요.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대요. 특임 기사님, 제 목소리 잘 들리세요?”
“선생님은.”
몸을 일으키는 건 눈을 뜨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렇지만 아파하며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폭발할 때 선생님이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때의 순간을 떠올렸다. 잿가루가 된 뱀파이어의 손에서 수류탄이 떨어지고 래드포드가 외쳤다. “저리 가!” 큰 손이 비루의 가슴을 떠밀었다. 눈앞으로 붉은 갈기 같은 머리칼이 느리게 휘날렸고, 이후의 기억이 없다.
“선생님은요?”
그리고 그 다급한 질문에도 대답이 없다. 감각이 둔한 손으로 비루는 닐의 팔을 붙잡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줘요, 선생님은요. 하얗게 질린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닐은 비루보다 훨씬 어른이다. 수십 년은 더 오래 살아왔고 그만큼의 경험도 더 많았다. 그러나 지금 이 경험은 그 역시 처음이다. 떨리는 숨과 목소리로 닐은 도저히 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말을 내뱉었다.
“블레나력 903년 8월 31일 오후 3시 17분, 레지널드 래드포드 중앙수도군 총사령관께서 반란 세력의 테러에 전사하셨습니다.”
네가 죽어야 했어. 널 죽이려던 걸, 레기가 대신 죽었어.
유품을 끌어안고 토트리가 외쳤다. 커트가 애써 말려보았지만 작은 몸에서 나오는 힘은 그가 괜히 서부사령관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독이 든 건 네 차였잖아!” 그리고 터져 나오는 외침도, 비루가 견디지 못할 만큼 크게 울려 퍼진다. 갈라진 목소리는 결마다 칼날이 되어 가슴을 찢었고 그를 향하는 시선은 창날이 되어 찌를 수 있는 모든 곳을 찔러댔다. 차라리 마음껏 피를 흘릴 수만 있었다면, 차라리 전부 쏟아낼 수 있었을 텐데.
마치 알고 있던 것처럼 래드포드는 집무실에 두툼한 유서를 남겨두었다. 유서에는 자신의 자리를 비루에게 주겠노라고 적혀 있었다. 비루는 제1부사령관도 아니었고, 그에 준할 만큼 이름을 알리거나 지지를 얻지도 못했다. 오스만은 그 글이 적힌 종이를 찢어발길 듯 구겨 쥐고 비루를 손가락질했다.
“전부 알고 있었어, 네가 각하를 죽였구나. 그까짓 잿가루, 길거리 뱀파이어의 것을 모아 담으면 그만이지.”
그렇다면 폭발물의 반입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오스만의 주장은 어느 정도 신뢰를 얻었지만 닐과 별장의 사람들이 메이드였던 뱀파이어의 목격담을 증언하며 그 이상의 힘은 얻지 못했다. 그러나 말은 남았다. 토트리의 시선도 오스만의 비난도 전부 남았다. 래드포드의 빈자리에 앉아 비루는 두꺼운 망토 아래 몸을 숨겼다. 나는 선생님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살리지도 못했다. 조금만 더 빨리 심장을 찔렀더라면. 선생님이 음료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챘더라면. 내가 시앙에 가는 걸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방학을 달라고 칭얼대지 말고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더라면.
차라리 그 독을 마셨더라면.
오른눈이 타들어 가듯이 아파온다. 눈두덩이며 머리로 열이 오르고 툭, 툭, 맥박이 세게 뛴다. 실라의 저주가 살아 있다. 산 채로, 그의 머리를 온통 휘저어 놓았다.
“래드포드 전 총사령관께서 유서를 쓰실 때, 네가 그 자리에 있었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저 애는 어땠을지 몰라도 넌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거지. 내 말이 틀려?”
“그러니까 모르바카 브렌튼, 자네의 말은… 내가 각하의 죽음을 사주했다?”
“틀려?”
“그럼 맞을까? 헛소리하지 말고 추모나 제대로 해. 군견 출신 부사령관이 장례식장에서 무례를 범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너만 부끄러워지는 게 아니야.”
“권력에 눈이 멀어 한참 어린아이를 살해하려고 했던 악마의 소문은? 당당하니?”
“농담 그만해.”
“농담 아니야, 제프 오스만. 넌 유서 내용을 알고 있었어. 맞지? 그래서 화가 났겠지. 래드포드가 물러나면 다음으로 네가 총사령관이 될 순서였으니까. 얼마 안 있어 내 말이 곧 여왕의 말이 될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자리를 빼앗겨버렸으니까. 그것도 인간 아이에게. 그래서 뱀파이어에게 수류탄을 주고 너희 종족을 위한 일이라며 구슬렸겠지. 대단한 사령관이군. 오스만,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고 싶은 말은 없어. 기대하고 있을 뿐이야. 저 애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