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고였다.
사소하면서도 심각했고 책임을 묻기도 힘든, 성가신 사고였다.
원인이 무엇이라고는, 돌이켜보면 어느 하나라고 꼽을 수도 없었다. 한나의 주변은 지루했고 지긋지긋했으며 지겨웠다. 그의 자서전을 쓰기 위해 펜을 들면 첫 문단의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밀려드는 졸음을 먼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삶은 성공적이었으나 재미는 없었다.
“…나, 한나. 내 말 듣고 있어?”
심지어 눈앞에 있는 약혼자마저도. 결혼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지루한 과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상대까지 입만 열면 시시한 소리나 지껄이는 사람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한나는 끈적거리는 카페의 메뉴판을 내려다보며 제이의 부름에 대답했다. “그래, 듣고 있어.” 그러나 돌아오는 건 짜증 섞인 한숨이다.
“웬만하면 당장 그만두는 게 좋아.”
비버의 카페는 대낮까지 사람이 없다. 워낙 구석진 곳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고,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이어 온 장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낡은 외관을 고수하는 것도 그랬다. 무엇보다 그 두 가지 이유 덕분에 단골이 아닌 새 손님이 쉬이 발길을 하기 어려워한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대로 한나가 비버의 카페를 찾은 까닭이 되었다.
그래도 저녁이 되면 술손님이 제법 있었다. 한나는 바뀐 가격표가 덕지덕지 붙은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오늘도 여기서 늦은 점심을 챙겼다. 산통을 깨는 제이의 재수 없는(이 말고 더 어울리는 표현이 있을까. 한나는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을 이에게 큰 찬사를 보냈다) 말만 없었다면 평화로운 보통의 오후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메뉴판을 볼 필요도 없었다. 그의 점심은 언제나 같았고 비버 역시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이미 조리를 시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제이가 입을 좀 다물었다면.
애초에 다른 볼일이 있다거나 해서 행동을 달리했더라면. 한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 건성으로 대꾸했다.
“뭘? 인생을?”
“한 마디도 듣지 않았군. 네가 남들 몰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들통난다면 넌 물론이고 내 체면도 바닥에 떨어지게 될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야?”
그나마 다행인 건 제이 역시 한나에게 감정적인 호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은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잘 해봐야 비즈니스 파트너 수준일 것이다. 그것도 웬만해선 눈도 마주치기 싫은 웬수 같은 파트너. 당장 일을 끝내고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돌아가 각자의 길을 걷고자 매일 기도하는 그런 관계.
결혼도 하기 전에 벌써 부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한나는 없어도 그만인 메뉴판을 접어 한 귀퉁이에 놓아두며 말했다. 똑같이 행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어쩔 수 없이 제 목소리에도 한숨이 섞여 나온다. 어쩔 수 없었다, 라고 스스로 변명하는 것도 지겨웠다.
“하긴, 일루미나티와 함께 외계인을 고문하는 시설을 카지노 지하에 만들어둔 걸 들킨다면 해외에서도 인터뷰를 하러 오겠지. 얼굴을 가려달라는 요청도 들어주지 않을 테고.”
“…뭐?”
“믿었니?”
“……아니, 농담하는 거 아니야, 한나.”
“농담처럼 들려서.”
그의 모든 말이 그렇게 들렸다. 그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말도 마찬가지였다. 제이 하나에게만 이런 감정이 든다면 적당히 권태기 같은 말로 얼버무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나는 더 오래전부터, 줄곧 인생의 모든 순간이 권태로웠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모에게 질문을 던진 순간을 떠올렸다. 최대한 권태롭지 않은 질문은 언제 끝이 났을까. ‘왜 저 남자죠?’ 아니다. ‘그래요, 잤어요. 왜요?’ 이것도 아니다. 좀 더 어렸을 때의…… ‘아빤 나쁜 사람이에요?’ 아니, 아니다. 좀 더 귀여운, 하늘은 왜 파란색이냐 같은 질문은 도통 기억에 없다.
그것마저 시시하고 재미없다. 남은 건 오직 한숨뿐이다. 이런 말을 하면 제이는 거기다 미간의 주름을 더하겠지만 한나에겐 미간을 좁힐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상의도 없이 코카인 장사를 시작해버리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다녀야 하냐고!”
“요즘은 펜타닐이 더 돈이 된대. 그쪽도 알아보는 중이야.”
“한나!”
“끝났니?”
“아직 안 끝났어. 대체 뭘 하는 거야, 왜 나한테 얘길 안 한 거야?”
그러니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는 이어가봤자 힘만 더 빠질 뿐이다. 한나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떴다. “제이.” 그리곤 그의 눈을 보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넌 몰라도 되는 일이야.”
제이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기가 찬 웃음을 뱉어내며 화가 났다는 갖은 제스처를 보이긴 했지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짓은 하지 않았다. 토라지면 늘 저랬다. 언제든 그랬다. 항상 제 말을 들어주어야 했고 제 의견대로 해야만 했다.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도 이것보다는 말을 잘 듣겠다. 밥이나 먹자, 새롭게 주제를 돌리려는 한나의 노력에도 제이는 생각 없다며 거부한다. 덕분에 직원을 부르는 건 한나의 몫이 되었다. 카페엔 한 명의 직원이 있었다. 긴 머리를 양쪽으로 대충 땋아 내리고 낡은 스니커즈를 신고 다니는 여자였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면서, 이 카페의 급료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다른 아르바이트도 닥치는 대로 하느라 늘 피로에 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정이 딱했고 꽤 애교도 있는 편이라 한나는 그에게 팁을 챙겨주는 걸 미루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직원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손님이 없는 테이블에 엉덩이를 비스듬히 걸치고 허공을 응시하는 웬 남자가 있었다. 카페의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 직원은 맞을 텐데 한나가 카페에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그는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청소를 하지도, 주방의 비버와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넓은 창으로 해가 들어오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남자의 반만 묶은 부스스한 갈색 머리가 빛을 받아 노란 밀빛으로 바래진다. 색으로만 따지면 제이의 금발이 훨씬 밝았지만 반짝거린다, 는 느낌이 드는 건 남자의 윤곽 쪽이었다.
이른 오후의 햇살은 가장 좋은 조명이니까. 그 조명이 눈앞의 제이한테도 예쁘게 내려온다면 좋으련만. 그는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여기,” 주문할게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입을 조금 떼는 정도로는 그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남자는 한나가 목소리를 내자마자 둥글게 굽어있던 어깨를 세워 뒤를 돌았다. 그리고 한나가 더 말을 잇기 전에 성큼성큼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주문 받아 드려요?”
그리곤 보일 듯 말 듯한 정도로만 입을 열어, 아주 건방진 응대를 흘려보낸다. 이전의 직원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제이나 할법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 태도는 뭘까? 비버를 불러서 뭐 이런 놈한테 에이프런을 둘러놓았냐고 화를 낼까? 비버에게 한나는 단골 그 이상의 존재니까 이런 불평을 쉬이 넘기지 않을 것이다. 평소 클레임 한번 없던 한나였다. 물론 저 대신 제이가 별것 아닌 일에도 열심히 딴지를 걸어주었기에 오히려 말리는 역할이 되곤 했지만, 손님을 보면서 인사도 않고 짝다리나 짚은 직원은 감싸주기 힘들다. 지금 이게 무슨 태도냐고 제이가 신경질을 부리면, 그 시끄러운 입을 틀어막고 제 쪽에서 비버를 불러내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제이는 남자를 흘끔 올려다보곤 “커피.” 퉁명스럽게 한 단어만 내던졌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오필리아가 미치지 않는 햄릿을 읽는다고 해도 지금만큼 놀랄 수 없을 것이다. 아깐 생각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긴, 그 정도는 평소랑 비슷하다. 밥 생각이 없을 뿐이지 커피 생각은 있었겠지. 여기서 다시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한 번, 제이의 태도에 자신이 놀랐다는 사실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커피.”하고 여전히 거의 벌어지지 않는 입으로 제이의 말을 따라 하며 주문서에 글씨를 휘갈겼다. 한나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거의 웅얼거리듯 제 주문을 마쳤다. “늘 먹던 걸로.” 그러자 이번에는 볼펜 굴러가는 소리만 조용히 들린다. 남자는 한나를 모를 텐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름이 뭐냐고도, 늘 먹던 게 어떤 거냐고 귀찮게 따지지도 않았다. 대신 볼펜을 멈추고 딱 한 가지를 물었다.
“술은 필요 없어요?”
한나가 주문한 메뉴는 평범한 클럽샌드위치였다. 안에 들어가는 햄이 좀 짜긴 해서 그 자체로는 맥주와도 잘 어울릴지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샌드위치를 먹을 땐 커피를 마시곤 한다. 그래서 한나의 메뉴에도 술 대신 커피가 포함되어 있다. 오늘 처음 본 직원이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비버가 미리 언질을 주었다는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더욱이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게 이상해진다.
한나보다 먼저 제이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술? 이 대낮에 술을 추천한다고?” 포인트는 달랐지만 어쨌든 의아한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독특했다. 남자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더니 서부 억양이 섞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될 건 없잖아요.” 그 느긋한 대답에 제이의 인상은 더욱 구겨졌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겨우 그 정도로 남자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제이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열 받았을 때 맥주라도 한잔하면 좀 나아지니까요. 안 그래요?”
왜냐하면, 내내 한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답이 나오고 나서야 한나도 남자를 제대로 마주했다. 똑바로 본 그는 훨씬 더 어렸고, 작은 갈색 눈동자엔 한나만큼이나 깊은 권태를 담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남자의 말대로였다. 그는 지금 열 받은 상태였고, 시원하게 털어 넘기는 한 잔의 알코올은 이런 때 좋은 친구가 되기도 한다. 흥미로워졌다. 이 제안을 시시하게 넘길 수 없었다. 단단한 의자의 등받이에 한 팔을 걸치고 한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 한 잔 줘.”
“한나!”
“옙. 뭘로 드려요?”
“맥주. 에일로.”
“늘 먹던 거랑, 에일. 알았어요.”
“내 얘기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그쪽은 커피. 끝이죠?”
당연히 제이는 화를 냈고, 남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뿐이랴, 남자는 무시하고 한나에게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는 제이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기까지 했다. 꼭 떼를 쓰는 어린아이에게 형식적인 관심을 주는 것처럼. 그래 놓고는 대답은 듣지도 않고 남자는 주방으로 멀어져갔다. 덕분에 제이의 분노가 길을 잃었다. 그 꼴이, 얼마나,
유쾌하던지. 오늘, 아니 이번 주, 어쩌면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한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도 설탕이 필요한지는 물어봐 주었다. 식사를 가져오면서 남자는 가장 마지막 순서에 제이에게 물었고, 제이는 이번에도 당연히 화를 내며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남자도 마찬가지로 시큰둥하게 그의 짜증을 넘겼다. 저 애가 널 다루는 법을 아는 것 같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넌 대체 뭐가 그렇게 즐겁냐며 제이가 묻는다. 그러게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즐겁지 않았는데 적어도 지금만큼은 웃을 수 있었다.
이런 공연을 거저 볼 수는 없다. 투덜거리는 제이를 무시하며 한나는 남자를 불렀다. “여기, 잠깐만.” 비버에게 막 주문을 넘긴 남자가 한나를 돌아보더니 다시 성큼성큼 걸어왔다. 움직임은 빠르지 않았지만 보폭이 커 몇 걸음 걷지 않아도 금방 남자는 가까워졌다.
“더 필요한 거라도?”
여전히 건방진 응대였지만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한나는 비스듬히 멈춰 서는 남자에게 10달러 지폐 세 장을 건넸다. 남자의 권태로운 시선이 한나의 눈에서 손으로 옮겨갔다.
샌드위치 두 배는 족히 될 액수였고, 이는 팁이 아니었다. 그를 즐겁게 해 준 대가. 오랜만에 웃음을 터뜨릴 수 있게 해 준 데에 대한 감사. 연극의 티켓값이라고 해도 좋았다. 한나는 그런 마음으로 돈을 내밀었다. 그 심오한 뜻을 남자와, 그리고 제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몰랐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제이가 맞은편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너 잘못 꺼냈어, 그거 10달러짜리야. 한나는 이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가 알고 싶은 건 제이의 반응이 아니라 남자의 반응이었다. 손사래를 치며 이만큼의 팁은 못 받겠다고 할까, 태도만큼이나 뻔뻔하게 감사하다며 받아 갈까. 어느 쪽이든 한나는 그의 앞치마에 내민 돈을 전부 찔러 넣을 작정이었지만 그 반응이, 이어질 남자의 앵콜 공연이 어떨지 보고 싶었다.
남자는 웃었다. 테이블에 놓인 지폐를 향한 눈을 가늘게 접고, 속을 들여다볼 수 없던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이를 드러냈다. 남자의 맨손이 한나의 지폐를 내민 손 위로 서서히 포개졌다. 손등을 쓰다듬는 것처럼, 손가락을 얽는 것처럼 하며 세 장의 지폐를 전부 가져간 남자는 “고마워요, 한나.” 그렇게 말하며 짧은 키스를 보냈다.
그래, 분명 키스였다. 뺨이나 손은 아니었지만 지폐 위에 색이 옅은 남자의 입술이 닿았고, 살과 살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고, 입술이 내려앉았던 지폐는 치맛자락 휘날리듯 한나의 턱 언저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