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가 그들을 찾아오는 건, 잦은 것처럼 보이긴 해도,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그의 방문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일어났다. 어떤 일이 생겼다든가, 뭔가 일이 벌어졌다든가,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든가.
그래서 이번에도 찬성은 그를 대접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걸음을 하셨느냐고. 덕분에 장소를 제공해 준 야마다 씨의 쥬쥬 베이커리를 한순간에 누추한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적어도 비루에게는 꽤 반가운 질문이었을 것이다. 딱히 귀한 분이 된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타니아가 온 힘을 다해 만들어 준 유니콘 프라페를 마시는 걸 좀 미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말입니다. 라고 운을 떼고, 비루는 대답했다.
“수상한 저택이 나타났습니다.”
오, 하고 이브와 타니아, 그리고 비렛이 느린 반응을 보여주었다. 좋은 시작은 아니었다.
“…설명이 부족했군요. 어느 날 빈 땅에 수상한 저택이…….”
“창틀에 예쁜 제라늄 화분이 피어 있고 지붕 위엔 비둘기가 앉아 있는 빨간 벽돌집인가요?”
“한 십만 프랑 정도 나갈 것 같은데.”
“정원엔 바오밥나무가 있나요, 매일 청소해 줘야 하는 활화산이 있나요?”
“야, 너희 장군님 너무 놀리지 마라. 워낙 바쁘신 분이라 신경 쓸 게 많아서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거야. 장군님, 그럴 땐 눈 딱 감고 데킬라 세 잔만 마셔봐. 눈앞에서 일이 싹 사라진다.”
“아침에 물 마시고 보면 두 배 이벤트 시작되죠.”
“괜찮아, 세 잔 또 마시면 돼.”
“끔찍하네요. 정체 모를 저택이 두 채가 되는 건 무서우니까 거절하겠습니다.”
그것은 이 그룹의 대표 수다쟁이들, Team. 장난꾸러기들이 시동을 걸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타니아와 비렛은 그렇다 쳐도 이브마저 Team. 장·꾸의 일원이라는 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긴 했다. 처음엔 비루가 군 장교(어느 군의 어느 위치라고는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았지만)라고 했을 땐 좀 군기가 잡히는 것도 같았는데, 한두 번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긴장이 빠졌는지 이젠 존대를 하지 않을 때도 종종 있었다.
하긴, 이렇게 된 데엔 이브의 불명예제대…도 한 몫 하겠지만, 비루가 등장할 때마다 꺼내는 화제의 황당함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 오늘만 해도,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은 소설 같은 얘기나 늘어놓고 있으니.
애써 분위기를 잡고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해서 듣게 된 얘기는 이랬다.
그러니까, 아무리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해 보려 해도 도무지 불가능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언제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겠고 누가 사는지도 도통 알 수가 없다. 산 중턱에 우뚝 세워진 그 저택의 주변으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산짐승도 근처에 가려고 하지를 않는데 오직 사람만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한 번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내내 지켜보았지만 창문이 열리는 것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저택의 형태를 한 괴물 같았다. 문처럼 커다란 입을 벌리고 사냥감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미지의 무언가라고 말이다.
이런 말은, 이브가 아닌 찬성 본인까지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 어색한 웃음을 지을 만한 얘기가 아닌가. 아무리 비렛의 두뇌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해도 이 정도까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걸 비루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진지하게 얘기한다. 찬성은 Team. 장·꾸에서 시선을 돌려 커피를 마시는 비타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해하기를 포기한 미소로 비루가 민망하지 않을 정도의 맞장구(“아, 그러시구나.” “와, 그렇군요.”)만 치고 있다. 어쩌면 그 맞장구가 비루를 더 민망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위기다.
“그거 진짜 기이하네. 방송사에 제보나 좀 해 봐라.”
“되겠습니까.”
비루의 진지한 말에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비렛에게 공감하게 되는 이 상황은 의심의 여지 없는 위기 상황이다.
“왜. 기밀? 그런 것 때문에? 근무지가 저 어디 네바다냐? 그런 거 때문이면 잘난 군인끼리 어떻게 잘 풀어보시든가요.”
“부끄럽게도 거의 한 소대의 인원이 그 저택에서 실종되어서 말입니다. 저희만으로는 수색이 불가능함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뭘 하시려나? 머리 좀 쓴다는 놈들 복면 씌워서 납치라도 하시나?”
“아무래도 그건 좀… 저희도 나름 외교라는 걸 합니다.”
“아니, 그럼 뭘 어쩌겠다고. 야 그것참 신기하다 하고 박수라도 쳐 줘?”
타니아가 정말 박수를 치려는 걸 겨우 막았다. 위기다. 다른 게 위기가 아니라 비루에게 충분히 예를 갖춰야 하는 입장인 찬성 자신마저 그에게 별 시답잖은 소리 마시고 얼른 프라페나 드시라는 말을 할 것 같은 게 위기였다. 어쩌면, 그 말을 하는 게 그에게 훨씬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한때 비렛이 정신 못 차릴 때 찬성이 보여준 사랑과 정성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비루도 그런 일침이 필요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아직 애 아닌가. 잘은 모르지만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저 애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몇 년 더 산 인생의 선배로서 바로잡아줄 의무가…
있다, 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그것도 아니죠. 머리 좀 쓴다 하는 사람은 아니어도, 당신들은 제가 다루기 편하니까요.”
비루가 품에서 꺼낸 복면을 계속 대들던 비렛의 머리에 씌웠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렛이 의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마침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먼저 제안까지 해 주시니, 이렇게 잘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고맙게 수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야, 씨X, 뭐 하는 건데! 야!”
“도무지 우리 잘난 부하들의 굳은 머리로는 이 기이한 문제를 풀 수가 없어서요. 군인도 아니고 제 부하도 아니고,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지도 않아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져도 딱히 큰일 날 것 없는 당신이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화났다. 눈은 물론이고 머리통 전체가 가려진 비렛을 가볍고 무자비하게 제압하며 비루는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심지어 상냥한 말도 아니다. 저렇게 말을… 쏘아대는 사람이던가. 비렛이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지 않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교본과도 같은 백 초크를 건 비루는 악을 써대는 비렛을 무시하고 찬성에게 물었다.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만 빌려주실 수 있으시겠냐, 그 질문에 찬성은
“그놈 하나면 충분하십니까?”
라고 물었고, 순식간에 현장은 조용해졌다. 비렛만 빼고. 아마 비루가 둘 정도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당장 이브부터 달아났을 것이다.
“충분합니다. 이거… 이 분으로 안 되면 그땐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죠.”
“그럼 뭐,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다행히(?)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찬성은 비렛을 내어주었다. 거기엔 깊은 이유가 있었다. 깊이 생각을 할 문제도 아니었고, 조금,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비루가 좀 이상한 말을 하긴 했다. 좀 터무니없고 대체 무슨 말인가 싶고, 그런 얘길 하긴 했지만 뭐, 사람이 좀 피곤하면 그럴 수 있는 거 아닐까? 별것 아닌 일을 좀 거창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주변에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괜히 걱정이 될 수도 있다.
비렛이라거나, 다른 사람이 찬성의 바뀐 생각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달걀 뒤집듯 뒤집히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게 생각이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저 정도, 그러니까 자기보다도 체격이 큰 사람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때려눕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인생 선배의 의무 같은 건 그렇게 강하지 않다.
여러분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그 말과 함께 비루는 백 초크를 마무리했다. 발버둥 치던 비렛이 소리도 내지 못하더니 이내 잠들듯 사지가 축 늘어진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산뜻한 미소와 함께, 비루는 늘어진 비렛을 한쪽 어깨에 짊어진 채로 누추한 곳을 떠났다.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이 희미하다. 마지막 기억은 드웬(찬성을 비렛은 여전히 이 이름으로 불렀다)이 자신을 짐짝 넘기듯 비루에게 넘겨준 것과, 지금 뭐 하는 거냐며 화를 내다 숨이 막혀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황당하기만 하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냐고. 날 기다리는 여자들이 지금 서울에 널렸는데 어린애 탐정 놀이 장단 맞춰 줄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비렛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직물의 작은 틈새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긴 했지만 어둡고 답답한 건 여전했다. 망할 복면이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 아직도 뻐근한 목덜미에 두어 번 마른기침을 뱉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손이나 발을 묶어두진 않았다. 심지어 주변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푹신하다. 전문가의 추측으로 보건대 필시 기십만 원 정도로 묵을 수 있는 방의 침대는 아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침대엔 언제 누워보나 했는데, 그게 여자랑 눕는 게 아니라 웬 망할 놈의 협박으로 눕게 되었다. 대참사다. 비렛은 머리를 덮은 복면을 집어 던지듯 벗었다.
트인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밝게 터지는 조명과 호화로운 장식이었다. 무슨 테마파크에 온 것 같았다. 미묘하게 고풍스럽고, 미묘하게 현대적이다.
“미친놈. 납치도 호화 크루즈로 하냐?”
“배가 아무리 커도 흔들림이 아예 없진 않습니다. 죽진 않았네요, 다행입니다. 앞으로 당신이 일을 끝낼 때까지 쓸 방입니다.”
비렛이 던져진 침대 옆으로, 어느새 말끔한 제복 차림이 된 비루가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을 덮는 잿빛의 제복은 방의 디자인처럼 묘하게 고풍스럽고 묘하게 현대적이다. 심지어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어깨 장식 아래로는 기다란 망토까지 시퍼렇게 늘어져 있는데, 새까만 벨벳 소파 위에 다리를 꼰 채로 비스듬하게 앉아 있는 그 모습이 꼭 만화에 나오는 악당 보스 같다. 얼굴의 거의 반을 덮은 검은색의 안대가 영향이 컸다. 험악한 인상을 덜어주고 싶었는지 색실로 자수도 놓았는데, 오히려 그 점이 훨씬 그를 권위적으로 보이게 해 주었다. 게다가 앉지도 못하고 의자 뒤에 서 있는 부하까지 거느리고 있으니, 아무리 비렛이어도 그 광경을 보고 나면 단전에서 올라오려던 욕설도 쏙 들어간다.
“지랄하네. 고소할 거야. 계약서도 동의도 없이 정체 모를 노동에 사람 부린다고 고용노동청 앞에서 1인 시위 할 거야. 야, 전화 어딨냐. 여보세요, 여기 사람을 무슨 불법 약물 밀반입하듯 하는 인간이 있는데 좀 잡아가쇼. 아니지, 아마 코카인도 나보다는 훨씬 정중하게 옮길 거다. 저기, 거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저 새끼 막무가내로 일 시키고 그러지?”
물론 비렛이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전제가 있다면 말이다. 비렛은 킹사이즈의 침대를 헤엄치듯 벗어나 보드라운 카펫 위를 밟았다. 양말 신은 발에 잘 관리된 양털이 기분 좋게 감긴다. 덕분에 깜박, 어?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사실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하고, 마음을 열 뻔했다.
그러나 아무리 일하는 법을 모르는 한량이라도 나쁜 자본가 놈들의 치사한 전략은 알고 있다. 돈을 좀 쥐어봤다 하는 놈들은 어디서 배워오기라도 하듯 자신 이외의 사람은 전부 잘 써먹을 수 있는 도구쯤으로 여기곤 했다. 비렛의 눈앞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이 남자도 그러지 않았는가.
“떠들어봤자 소용없어요. 이미 보호자한테 허가도 받았고, 여기까지 온 이상 당신 자력으로 돌아가지도 못해요.”
저 보아라. 글자 하나하나에 묻어나는 오만과 건방에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보호자? 무슨 보호자, 난 그런 거 없어. 내가 내 보호자야.”
“알았으니까 빨리 환복해요. 설명도 같이 할 테니까 입으면서 들어요.”
“뭔 환복. 못 해, 안 해. 어디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 봐, 증언할 때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똑같이 반복하면서 전부 고발해 버릴 거야.”
심지어 교과서적인 멘트로 무시까지 한다. 이젠 드러누울 때라고 비렛은 생각했다. 살면서 아르바이트나 좀 해봤지, 제대로 된 일은 해본 적 없으니 시위를 어떻게 하는지를 알 턱이 없지만 주워들은 건 있었다.
무의미한 반항은 사람을 피곤하게만 할 뿐이다. 고집을 부리는 비렛에게 비루는 결국 인상을 찌푸린 얼굴을 보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두꺼운 안대의 끈이 이마를 거의 덮었지만, 눈 주변으로 진한 주름이 그림자를 만들어 쉽게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신호로, 비렛은 카펫이 깔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하자는 거 아니야. 내가 시위를 할 뿐이야.
…시위를 하신다고요.
그래. 민주 시민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취할 수 있는 정당한 행동 중 하나잖아.
민주 시민이요.
그래. 나 귀화 안 해서 아직 미국 시민이야. 귀화해도 민주공화국 시민이겠지만.
미국 시민이요.
…그래.
그런데 시위를 하면(?) 할수록, 왠지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원래 시위라는 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는 걸까. 비렛이 잘 모르는 것뿐이지,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는 이런 냉대를 받으며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는 걸까. 결국 이유 모를 압박감에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는데, 의자에 앉아 있던 비루가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짙게 썼던 인상은 그새 깨끗하게 지우고 은은하며 인자하기까지 한 미소를 내보이면서 말이다. 비렛은 떠올렸다. 이 새끼, 복면 꺼낼 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요.”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무언가 꺼내기 시작한다.
“하나는 비렛이 스스로 옷을 갈아입고 얌전히 제 설명을 듣는 거예요. 비렛은 그러니까… 민주 시민이니까 그 정도 권리는 가질 수 있지요.”
왼손의 검지를 치켜들고, 비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특별할 건 없었다. 더 좋을 것도 없었고, 이미 비렛에게 주어진 임무 그대로였다. 비렛에겐 장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다. 그의 오랜 데이터로 보아 보통 이런 상황에서 뒤따르는 선택지는 죽음이거나, 혹은 죽기보다 괴로운 것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저희 우수한 메이드에게 속옷까지 갈아입혀지는 것입니다.”
아니라 좋잖아.
“당연히 두 번째지. 아니, 메이드를 데리고 있으면서 소개도 안 해준 거야? 우리가 그 정도 사이야?”
“우리가 무슨 사인데요. 어쨌든, 정말 메이드의 도움을 받으실 건가요?”
“당연하지. 예뻐?”
“저희 메이드는 정말 우수해요. 보통이 아닙니다.”
“와, 특히 어떤 게?”
장난 아니다. 초호화 스위트룸에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긴 채 메이드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만약 시위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멍청하게 혼자 옷이나 갈아입으며 지루한 설명을 들었을 텐데, 역시 투쟁의 역사는 무시할 수 없다. 치사한 자본가 같으니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절대 이 비렛 리는 싼 값에 부려 먹을 수 없다.
비렛은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비루를 재촉했다. 내가 연상이 취향이거든, 우수하다면 경력자니까 누나들이지? 아, 이거 갑자기 끌려와서 그냥은 좀 그렇고 한 번 씻기도 해야겠는데. 승리를 거둔 노동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원하는 건 일단 쏟아내고 봐야 했다. 생각해 보라. 스위트룸이다. 그럼, 그에 걸맞은 이벤트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비렛은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비루의 망토 자락으로 장난을 치며 열심히 떠들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비루는 정말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그러니까 비렛이 즐거워하면 비루는 지겹다고 손사래를 치며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준다든가, 자기가 꺼낸 말을 후회하며 신경질을 부린다든가 하는 게 정상이었고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여전히 인사한 미소를 지은 채로… 어쩌면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기도 하며 계속 같은 질문만 하고 있다. 정말로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죠? 그 모습이 꼭 단품 메뉴만 주문하는 손님을 붙잡는 키오스크 같다. 비렛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저희 메이드는 우수하니까요.’ 그 말이 힌트일지도 모른다.
“…많이 연상이야?”
“어떤 게 더 절망적일 것 같아요?”
“……어떤 선택지 중에?”
예를 들어 덜 연상이거나 많이 연상인 것 중 하나를 고르라거나, 그런 말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질문에 비렛이 작게 물었고, 비루는 대답 대신 제 뒤를 지키던 남자를 불러 귓속말을 건넸다. 아니, 왜 멋대로 일을 진행하는데. 너 나한테 물어봤잖아. 나 아직 대답 안 했잖아. 내가 대답할 때까지 뭘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조금 전 일단 메이드부터 불러오라던 태도를 감추고 비렛은 망토 자락을 움켜쥐며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나 배는 떠났다. 남자는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더니 커다란 문을 열었고, 그 너머에서 등장한 이들은…….
비렛보다 어깨가 한 뼘은 더 클 건장한 네 명의 남성이었다.
“소개할게요. 저희 우수한 메이드 팀입니다. 환복 시중 경력만 15년이 넘어가죠.”
“메이드라며! 메이드라고 했잖아!”
“메이드입니다. 가사(家事)를 담당하고 계시거든요.”
사기다. 기만이다. 비렛은 사지를 붙잡혀 탈의실로 끌려가며 소리쳤다. “이 잔인한 자식들아! 말을 해 줘야지! 정보 제공의 의무를 지켜야지!”